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4관왕을 수상하자, 영화 촬영지까지 덩달아 화제가 됐다. 기우(최우식 분)가 동네 슈퍼에서 친구 민혁(박서준 분)을 만나는 장면, 기정(박소담 분)이 복숭아를 사 들고 박 사장(이선균 분)네로 가던 장면이 바로 이곳 아현동이다.
지금은 코로나19 확산세에 발길이 뜸해졌지만, 이 사실이 알려졌을 당시만 해도 국내외 관광객은 성지 순례하듯 이곳을 찾았다. 서울관광재단이 '기생충 투어'라는 이름으로 촬영지 곳곳을 소개한 덕도 있다.
아현동 골목은 비단 기생충에만 등장한 곳이 아니다. 조선 시대 대표 서민 거주지로, 문헌에도 등장했다. 현재는 아현역 일대 뉴타운 개발을 통해 신축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서는 등 옛 모습을 벗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아현역과 애오개역 사이의 골목길은 재개발 전후의 동네 변천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아현역 근처 손기정로와 환일길 일대 골목에서 재개발 전의 과도기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고층 빌딩에 둘러싸인 근대한옥, 마을버스가 다니는 비좁은 고갯길 너머에 자리한 대로(大路) 등 생경한 풍경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현동에는 뉴트로 콘셉트로 공간 재생을 선택한 곳도 있다. 1958년 지어진 목욕탕 행화탕이 대표적이다. 이곳은 재개발로 철거가 확정된 이후 몇 년 동안 방치됐다가 2016년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문화예술 콘텐츠 기획사 축제행성이 '예술로 목욕합니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전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행화탕 안에 목욕탕 콘셉트 카페인 행화커피도 문을 열었다. 목욕탕 관련 음료와 굿즈가 인기다. 이외에 구두공장 건물이 복합문화공간 '애오개123'으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 한강을 주름잡던 마포나루와 이 일대에 살았던 당시 인물들의 자취를 더듬으며 길을 걷는다? 마포나루길에선 가능하다. 옛 마포나루터를 찾아보고, 흥선대원군과 토정 이지함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장통 노포에서 식도락을 즐기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길이다. 고고학자가 유적지를 발굴하듯 표지석만 남은 옛터에서 이야기를 엮어가는 재미가 퍽 쏠쏠하다.
첫 목적지는 아소당터(아소정터)다. 흥선대원군의 별장터인데, 흥선대원군은 말년을 보낼 별장과 자신의 묘소를 길지에 조성했다고 한다. 지금은 작은 공터로 남아 아소당터 표지석이 없다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용강동 고갯길에는 1920년대 지어진 개량한옥이 눈길을 끈다. 바로 정구중 가옥이다. 용강동 부농이었던 이모씨가 자신의 외동딸을 위해 장안 4대 목수로 소문난 안영달에게 부탁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압록강 유역의 홍송과 백송을 뗏목으로 옮겨와 한강에 2년 동안 넣어 두었다가 1년 동안 건조한 뒤 집을 짓기 시작했다고.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 집을 다시 보니, 100년 된 가옥이 제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울 따름이다.
고갯길을 넘어 마포 사거리에 닿으니, 토정 이지함(1517~1578) 동상이 보인다. 조선 중기 학자 토정은 '토정비결'의 저자이자 조선 3대 기인으로 알려졌다. 토정은 조선 최초의 양반 상인으로서 상공업을 권장하는 실학의 선구자로 살았다. 굶주린 백성에게 곡식과 소금을 나눠 주고, 바다와 땅을 활용해 먹고살 방도를 알려주는 등 구휼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일생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 흙담 움막집에서 살아 '토정'이라는 호가 붙었다. 토정의 집터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실감난다.
마포와 소금은 깊은 연관이 있다. 옛날 삼개포구로 불렸던 마포나루는 조선 후기에 들어 해상무역의 중심지가 됐다. 서해안에서 생산된 소금과 젓갈이 주로 마포 주변에서 거래됐다. 마포나루터의 번성했던 상권은 마포갈비 골목을 비롯한 음식문화 거리로 이어졌다. 옛날 뱃사람과 상인들이 고기를 숯불에 구워 먹던 것이 마포갈비의 유래가 됐다는 것이다.
족발 골목, 전 골목으로 유명한 공덕시장은 전성기 시절 점포 수만 600여개에 달했다고 한다. '고기 천국'이라 불리는 마포 먹자골목에서 연탄불에 구워 먹는 양념 돼지갈비를 서울에서 처음 선보인 최대포집을 비롯해 국물에 밥을 토렴해주는 사골 곰탕집 마포옥, 바싹 불고기의 원조 역전회관은 먹자골목의 필수 방문 코스다.
사람들의 통행이 잦은 서교동·연남동·상암동·망원동과 인접했지만, 거리는 비교적 한산한 성산동에는 숨은 명소가 꽤 있다. 골목 여행의 묘미를 알고 싶은 이들이라면 성산동을 걸어야 하는 이유다.
성산동에는 산이 성처럼 둘렀다는 뜻을 지닌 성미산이 있는데, 성산동의 지명이 이곳 성미산에서 유래했다. 성미산은 해발 66m에 불과해 산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주민들이 즐겨 찾는 힐링 명소다. 성미산 바로 아래에는 마포중앙도서관을 비롯해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서울의 3대 빵집으로 불리는 리치몬드 제과점이 있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위안부 역사와 현재에도 발생하고 있는 세계 분쟁과 여성 폭력에 관한 정보를 전시하는 곳이다. 리치몬드 제과점은 성북동 나폴레옹과자점에서 일하던 명장이 1979년 독립해 차렸으며, 서울 빵지 순례 필수 코스로 소문났다.
성산동에서 서교동으로 넘어가면 최규하 전 대통령이 2006년 서거할 때까지 약 30여년 동안 거주했던 단독주택이 있다. 최규하 전 대통령의 유품을 보존하고 거주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두어 생활사 박물관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망원역으로 가는 길에는 K-팝(POP) 아티스트와 관객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인 비트로드가 있다. 스타와 함께하는 영상 통화 이벤트를 비롯해 팬 사인회 같은 행사를 다양하게 진행하고, 음반과 굿즈도 판매한다. 이외에 망원역 1번 출구 근처 주택가 골목에는 김소영·오상진 아나운서 부부가 운영하는 북카페 당인리 책발전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