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지(志) 지리1
∙ 만리장성의 남쪽에 있는 나라를 중국이라 하고 요하의 동쪽에 있는 나라를 동국이라 한다.
- 정약용, 『여유당전서』
∙ 사천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을 세웠으니
- 『조선왕조실록』 고종 34년(1897년) 10월 13일
∙ 악마는 프레임에 있다. 애국가는 가사가 문제의 핵심인데 작곡자에만 국한하고, 간도는 20세기 초까지도 우리 땅인데 아득한 고구려 발해 시대에만 가둬두는 프레임, 그 악마의 프레임을 깨뜨려라. - 강효백
∙ 『삼국유사』·『제왕운기』·『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한국 7대 대표사서 총 약 2억 9800만자엔 ‘무궁화’는 단 한 글자, 그것도 단명의 상징으로 나온다. 반면 ‘삼천리’는 신라말부터 고려와 조선시대 최악의 유배 형벌 용어였다는 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우리나라 고유한 영토는 남북 4천리(만주도 대한영토)라는 기록도 종종 나온다. 잃지 않으려면 잊지 않아야 한다.- 강효백
『아방강역고(고구려~발해)』에 이어쓰는『新아방강역고(고려~현재) 』
∙무궁화는 천박한 자질에 활기도 없어 빈 골짜기에 버려지리(薄質消沈委空谷).”
-정약용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모든 꽃은 아름다운데 꽃을 이처럼 저주하는 글을 본 적이 있는가? 박학강기한 다산이 무궁화의 더러운 내력을 어찌 몰랐겠는가? 이것이 바로 다산의 발전적 계승자를 추구하는 필자가 법학 논문과 제도 개혁 칼럼을 쓰는 것을 포기하고 무궁화의 인문·사회·자연·예술 모든 것에 매일 평균 16시간씩 300여일간 집중 탐구하게 된 주요 계기다. 대한민국 거의 모든 국가상징을 독점 지배하는 무궁화, 그 꽃나무로 위장한 욱일기를 퇴출시키는 대신 3500여종이나 되는 우리나라 아름다운 자생종 꽃중에서 국민이 선택한 꽃을 진짜 나라꽃으로 만들기 위해, 200여년만에 다산의 선각과 예언을 사실로 증명하고 실현하기 위해.
정약용이 1811년에 편찬한 역사지리서인 『아방강역고』에서도 예맥과 말갈 발해의 강역을 상술하였고, 요동 지역은 수복해야 할 강역으로 보았다. 61살 이후 다산은 주로 이전의 저작들에 대한 수정 가필과 원고 정리에 주력하고 몇 편의 시문을 썼을 뿐, 새로운 저작에는 착수하지 않았다.
『아방강역고』는 고조선에서 발해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대 왕조들의 강역 변천을 문헌 중심으로 살피고 그 내용에 대하여 고증하였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아방강역고』는 장지연(張志淵, 1864~1921년, 친일 변절자로서 친일인명사전 등재인물)의 주석에 의해 재발행 되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조선총독부에 의해 금서로 규정되고 이후의 개정과정도 상당히 불투명하여 현재 전하는 『아방강역고』가 정약용의 판본과 같은지는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필자는 잘 알려진 것, 많이 논의돼 온 것보다는 새로운 것과 잊혀진 것을 사랑한다
고구려·발해까지 북방 영토에 대해서는 정약용을 비롯한 선배 학자들의 거작들이 참 많다. 고구려·발해 때 만주가 우리 땅이라는 너무나 많이 논의돼 왔고 뻔한 이야기다.
또한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다산이 새로운 서적 저술을 멈춘 때는 그의 나이 61세다. 지금 필자 나이도 61세, 다산과 백범의 맥을 잇는 실사구시·민족주의·신실학자를 지향하는 필자는 다산이 새로운 서적 저술을 멈춘 그 나이와 그 범위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겠다. 즉, 다산의 고구려에서 발해까지 우리 영토 「아방강역고』 에 이어 고려에서 현대까지 우리 영토 『신아방강역고』를 쓰겠다.
일제와 식민사학이 왜곡 설정 한정시켜놓은 그 비좁고 함정 많은 울타리를 훌쩍 뛰어 넘겠다.
식민사관, 중화사대주의, 서구우월주의, 또는 사이비 민족주의가 조작 오염시켜 놓은 2차사료는 철저히 배제하고 사료가치가 있다고 공인된 한·중 양국의 대표 문헌을 고증 재조명해 드넓은 진실의 광야에 올곧은 직필을 쓰겠다. 고려(918~1392년)부터 시작하여 조선(1392~1897년), 대한제국(1897~191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1945년), 대한민국(1948~현재)에 이르기까지 북방영토를 시대가 가까울수록 가중치를 더해 쓰도록 하겠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국가상징을 바로잡기 위해<두 얼굴의 무궁화>, 총한번 쏘지 않고 대한민국 국토관을 4천리로 수복하기 위해 <대한영토 사천리>, 세계인류사상 초유의 무혈민주혁명 무혈국토수복의 최종승리를 위해 나를 던진다.
애국가∙삼천리∙무궁화 톺아보다 발견한 5대 충격&깨달음
8월15일. 올해로 광복절 75주년을 맞았다. 지난해 1월 <신경세유표 10-애국가>를 시작으로 <신경세유표 11 –삼천리>, <신경세유표 12- 무궁화>에 이어 지난 달 『두 얼굴의 무궁화- 국가상징 바로잡기1』를 출간하기까지 필자가 참조한 우리나라 기본 문헌은 한국사 유이무삼(有二無三)의 정사(正史) 『삼국사기』와 『고려사』를 비롯 『삼국유사』 『제왕운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한국사 7대 사서였다. 여기에서 팔자가 받은 충격과 함께 얻은 깨달음은 다음 다섯 가지다.
첫째, 조선이 망한 첫째 원인은 사색당파 싸움이 아니라 지도층의 부정부패와 종일매국 반역행위 때문이다. 대한민국 광복의 첫째 원인은 미국의 원조 때문이 아닌, 백범을 비롯한 무수한 항일독립 애국지사와 깨어난 민중이 흘린 선혈 덕분이다.
둘째, 『삼국사기』부터 『승정원일기』까지, 한국사 7대 대표사서 총 약 2억9800만자를 전수분석하면서 한민족 고유의 나라꽃이라는 무궁화가 단 한 글자, 그것도 단명의 상징으로 나온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반면, 대한영토 사천리(만주도 대한영토), 삼천리는 신라말과 고려와 조선시대 최악의 유배 형벌 용어 였다는 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셋째, 전지적 일본 시점으로 조작·왜곡 서술한 역사와 국가상징이 대부분이다. 실례 하나만 들면, 일본이 가장 열등감을 느끼는 고려시대의 모든 사서가 국보로 지정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국보는커녕 보물도 아닌 시도지방유형문화재(『고려사』: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4호, 『고려사절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5호)로,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식한 최초의 역사서 『제왕운기』 보물 418호로 처박혀 있다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팩트였다. (1)*
넷째, “네 탓 그들 탓이 아니다. 내 탓 우리탓이다” 일제탓만 해서는 안된다. 식민지에 자기나라 꽃나무 심는 것은 어쩌면 제국주의 국가의 본질이자 당위라고 할 수 있다.(2)* 다 떠나서 우리 옛시조와 옛민요에 무궁화가 단 한마디도 없는 것은 논란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한국 양대 정사(正史)『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무궁화(槿)’가 단 한 글자도 없는 것도 논란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흔히들 교주의 혹세무민을 믿는 사이비종교 광신도들을 비정상이라 비판한다. 그렇다면 자국에 한그루 야생나무도 없고(3)*, 전통문학(4)*·음악·미술에 단 1점도 없는 꽃을 권력자가 나라꽃으로 세뇌한다고 그대로 믿어온 우리들은 정상인가? 깊은 자아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다섯째, 무궁화를 한국 고유의 나라꽃으로 조작한 일제보다 10배 나쁜 자는 옛 매국노이고 100만배 나쁜 자는 무궁화를 한국의 나라꽃으로 날조한 일제 보다 열 배 나쁜 자들은 옛 매국노들이다. 이들보다 백배 나쁜 자들은 무궁화 관련 ‘가짜 텍스트’를 조작 유포한 종일 매국 지식인 현행범이다.
무수히 많이 마주친 추악한 장면 중 그냥 넘어가서는 절대 안된다고 판단되는 것 하나만 들겠다. 교육부 산하 국책연구기관 한국학중앙연구원(박정희 전대통령이 설립한 정신문화연구원의 후신)의 『한민족대백과사전』 “무궁화는 고려시대에는 전 국민으로부터 열광적 사랑을 받았으며, 문학적·의학적으로 ‘진중한’ 대우를 받았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일본대백과전서』와 『차화대사전』등 일본 문헌의 “무궁화는 무로마치 시대 때 ‘진중한’ 대우를 받았다(ムクゲ,室町時代から茶花として珍重され)”를 그대로 베껴 무로마치 시대를 고려시대로 둔갑시킨 것이고 ‘진중한’ 이라는 관형어조차도 생짜로 표절 자기 역사 왜곡이라는 패륜적 범죄현장이다.
『고려사』를 지방문화재로 처박아놓은 자기역사 모독 집단범죄 동기는···
필자의 <新아방강역고>는 세계인류사상 전무후무한 자기역사모독, 집단패륜범죄의 거증, 국보도 보물도 아닌 지방문화재로 처박아 둔 『고려사』 톺아보기부터 시작한다.
반만년 한민족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당당하고 강인한 시련과 극복의 자주독립혈사 『고려사』는 한국사상 최고의 명군 세종대왕이 주도해 편찬했다. 1438년(세종20년) 『고려사』를 편찬하기 시작해 1448년(세종30년)에 완성, 초판을 찍어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이 책이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위해 고려왕조를 지나치게 폄하했다고 판단, 김종서와 정인지 등에게 개찬을 하게 해 결국 1451년(문종 1년)에야 완성됐다. 청신했던 조선 초기 최정예의 지성을 집약해 펴낸 『고려사』는 세가 46권, 열전 50권, 지(志) 39권, 연표 2권, 목록 2권 등 총 135권 75책으로 구성됐다. 축약본 『고려사 절요』(1451년)를 편찬할 만큼 글자 수 총 336만9623자의 방대하고 세세한 『고려사』는 사료 선택의 엄정성과 객관적인 서술 태도로 세계적인 극찬을 받고 있다.
“고려의 사방 경계는, 서북은 당 이래로 압록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은 선춘령을 경계로 삼았다. 서북은 그 이르는 곳이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은 그것을 넘어섰다.西北, 自唐以來, 以鴨綠爲限, 而東北則以先春嶺爲界. 盖西北所至不及高句麗, 而東北過之”
일제와 식민사학계가 『고려사』를 국보도 보물도 아닌 지방문화재로 처박아놓은,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자기역사모독 패륜범행동기의 하나는 바로 이런 “고려의 영토가 고구려 영토보다 넓었다”는 사실(史實)이자 사실(事實)을 은폐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이는 이제껏 우리 역사와 지리 국가상징물에 전지적 일본인 시점으로 자행해온 전과들을 조회해 보고 그리고 필자가 앞으로 계속 밝힐 사실들에 비추어보면 너무 지나친 의심이나 비판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필자는 고려의 북방영토를 <고려사>를 중심으로 상세히 서술하고자 한다.(2회에 계속)
◇◆◇◆◇◆◇◆◇주석
(1)*『고려사』, 『고려사절요』,『제왕운기』등 고려 역사서를 제외한 한국대표 사서 『조선왕조실록』(국보 151호), 『승정원일기』(국보 303호), 『삼국유사』(국보 306호), 『삼국사기』(국보 322호)등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2)*식민지에 자기나라 꽃 심는 게 제국주의다. 그래서 네델란드는 인도네시아에 튤립 심고 스페인은 멕시코에 카네이션 심고 영국은 미국땅에 장미 심고 프랑스는 퀘벡에 백합 심고 일본은 한국땅에 무궁화 심은 거다.
(3)*<한중일 야생 무궁화 수량(추산) 비교> *한국: 0그루 *중국:수십만그루 (근거: 세계공인 무궁화 원산지, 구글 바이두 사진), *일본: 수만 그루(근거:무궁화 토착화지역, 야후재팬 사진&동영상) 이래도 무궁화가 한국 고유의 나라꽃인가?
(4)*<무궁화 20세기 이전 한·중·일 시문학>
*한국: 시조0수, 가사0편 *중국: 시 80여수, 부6편 *일본: 하이쿠 200여수,단카(와카) 30여편. 이래도 무궁화가 한국 고유의 나라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