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의사 후손 윤주 “윤봉길 의사 상해 의거는 광복 결정적 계기”

2020-08-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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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특별인터뷰

명맥만 유지하던 임시정부 다시 소생시켜

폭탄에 다리 잃은 시게미쓰 ‘패전의 상징’

54년간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에 헌신

백부의 흔적 깃든 선천에 비석 세우고파

서울 서초구에 있는 윤봉길 동상 앞에 선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사진=유대길 기자 ]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가 있고, 잊어서는 안 되는 이름이 있다. 김구·안중근·이봉창·유관순·윤봉길 의사 등 한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순국선열이 그들이다. 하지만 흘러가는 세월은 기억을 조금씩 희미하게 한다. 매헌 윤봉길의사기념관이 서울 서초구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잊지 않으려면 알아야 한다. 제75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에 50여년을 바친 윤주 부회장(73)을 만났다.

-제75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인애국단 활동을 기록한 ‘도왜실기(屠倭實記)’ 국역판(1946) 서문에서 ‘한국 해방의 단서가 된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이 솔선해서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창해 연합국의 동의를 얻은 것은 그 원인이 윤 의사의 장거에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윤 의사의 '상해 의거'는 우리나라 광복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좌우 노선 싸움으로 분열돼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임시정부를 다시 소생시켰다. 의거에 크게 감동한 당시 장 총통이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고 한중 군사동맹도 체결됐다.”

-윤 의사 의거로 오른쪽 다리를 잃은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이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만에 정박해 있던 미군함 미주리호 갑판에서 일본 천황을 대신해 항복문서에 서명을 했다.

“당시 기록 영상을 보면 ‘시게미쓰가 10여년 전에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의 애국자에게 폭탄을 맞고 중상을 입어 의족을 달고 나왔다’는 설명이 나온다. 의족을 착용해 지팡이를 짚은 모습은 패전의 상징처럼 보였다. 일본의 항복 현장에 윤 의사의 혼이 깃들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큰아버지인 윤봉길 의사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건 언제인가?

“아버지는 안방 장롱 속에 흰 보자기에 싸인 무엇인가를 늘 감춰두셨다. 가끔 그것을 꺼내 보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보물처럼, 신주단지처럼 소중히 다루셨다. 충남에 있는 예산초 5학년에 다닐 때였다. 친구들과 집에서 놀다가 흰 보자기가 떠올랐다. 장롱을 뒤져 풀어보았다. 그 속에는 피 묻은 손수건·가죽지갑·중국지폐·동전·회중시계·안경집 등이 있었다. 친구들에게 자랑한 후 장롱 속에 다시 넣어 놨다. 엉성하게 매어진 보자기를 보신 아버지께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났다. 그날 저녁 아버지께 윤 의사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밤늦게까지 윤 의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대학생이던 1966년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에 가입했다고 들었다. 54년 동안 기념사업을 하며 기억에 남는 일이 많을 것 같다.

“윤 의사는 1932년 12월 19일에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에서 순국했다. 아버지와 함께 1992년 4월에 60주년 기념사업으로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기념비’를 건립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는 순국기념비는 반드시 우리나라 돌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서울 망우리 한양석재공업소에서 용두와 거북이 그리고 바닥돌을 제작해 부산항에서 일본으로 보냈다. 1993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윤 의사가 순국한 곳을 답사했다. 그때 기념사업에 대한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루쉰(魯迅)공원 안에 있는 윤 의사 기념 유적인 ‘매헌(梅軒)’과 매헌생애사적비 및 의거현장 표지석을 건립할 때 어려움은 없었나?

“기념 정자를 지을 때 중국 쪽에서는 ‘매정(梅亭)’이라고 부르길 원했지만 논의 끝에 2009년 ‘매헌’으로 변경했다. 1995년부터 진행한 매헌생애사적비 건립도 쉽지 않았지만 결국 화강암 자연석으로 크게 세웠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양신화 선생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1932년 5월 1일 일본 아사히신문에 실린 ‘상해 의거’ 직후 사진이 윤 의사가 맞다는 것도 밝혀냈다.

“1999년 사진 속 인물이 윤 의사가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 됐고, 2008년 8월 국가보훈처에서 윤 의사가 맞다고 공식 발표할 때까지 10년이 걸렸다. 의혹 제기에 대한 정정 보도도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일부 학생들이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와서 ‘가짜 사진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가슴이 너무 아프다. 윤 의사 연행사진은 ‘상해 의거’를 실증하는 것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사료다. 문화재청은 하루 빨리 이 사진을 보물로 재지정해야 한다. 매우 중요한 문제다.”

-54년간 기념사업을 하시면서 윤 의사의 정신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을 것 같다.

“윤 의사는 1927년 저술한 ‘농민독본’을 통해 ‘천 가지 만 가지 낡고 물들고 더럽고 못생긴 것을 무찔러 버리고, 새롭고 순수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 우리들 세상이 잘살도록 하자’고 말했다. ‘세계를 움직이려거든 내 몸을 먼저 움직여라’의 준말인 ‘세움내움’에 그 뜻이 잘 담겨있다.”

-의거 80주년 때는 매헌전집을 발행하는 의미 있는 작업을 하셨다. 90주년이 되는 2022년 전에 이루고 싶은 계획이 있나?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이 1988년 12월에 건립됐다. 이후 윤봉길 숭모비·매헌교·윤봉길 동상이 만들어졌고, 인근에 매헌초도 생겼다. ‘양재시민의 숲’을 역사성이 담긴 ‘윤봉길 공원’으로 개명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중국 의거현장·일본 순국지·만주 등 백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거의 다 가봤다. 윤 의사가 1930년 일본경찰에 체포돼 평안북도 선천경찰서에서 달포간 구금됐다 풀러났다는 것을 편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백부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선천 일대에 가 작은 비석 하나라도 세워드리고 싶다.”
 

서울 서초구 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아주경제와 인터뷰 중인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사진=유대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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