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까닭을 짐작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처럼 갈등과 대립이 일상화된 나라에선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분란을 자초하거나 격화시킬 수 있다. 대통령의 말은 그 나라와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간주되므로 가급적 말을 아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주어진 시점에, 주어진 국가적 사회적 이슈에 대한 최종 판관이다. 판관이 제 역할을 못하면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기 어렵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한다는 소리까지 듣는 나라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문 대통령은 집권 초만 해도 부드러운 이미지와 경청하는 자세로 ‘소통하는 대통령’으로 기대를 모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불통(不通) 이미지와는 대조적이었다. 2017년 9월 한 여론조사에선 문 대통령이 국민과 소통을 잘하고 있다는 긍정평가가 무려 81.4%였다. 이 수치가 2년 후인 2019년 10월 조사에선 48.0%로 거의 반토막이 나버렸다(경향신문 한국리서치 조사). 조국 사태 과정에서 드러난 대통령의 인식과 대처방식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게 중론이다. 그 연장선상에 오늘의 대통령의 침묵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적폐’라는 말 대신 ‘적폐구조’라고 했더라면
일찍이 대통령의 조정자(調停者) 역할에 주목한 사람은 함성득 전 고려대교수다. 대통령학 연구자인 그는 민주화 이후 대통령은 “명령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화와 설득을 통해 사회 이익집단들 간 갈등을 조정하고, 효과적인 정치적 연합과 제휴를 이끌어낼 수 있는 대통령”이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한국대통령의 새로운 역할과 리더십’, 2002년 행정논총 제40권 제30호). 우리가 문 대통령에게 걸었던 기대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나 싶다. 함 교수는 명령자(命令者)인 전자를 경성(硬性) 대통령, 후자를 연성(軟性) 대통령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다른 많은 학자들의 견해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강원택, 나태준, 정용덕, 홍성만, 김광구 등은 “정당과 정치인이 한쪽 편을 옹호함으로써 국민적 갈등을 조장하고, 이를 자신의 공직 진출과 유지에 활용하는 ‘갈등의 사유화’(privatization of conflict)가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정치적 타협과 설득, 조정과 중재에 기초한 갈등관리 리더십이 요구된다”고 했다(‘국민통합을 위한 공공갈등의 조정’ 나태준 2017년).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측면도 있다. 필자가 듣기로 원래 여권 일각에선 ‘적폐’라는 말 대신 ‘적폐구조’라는 말을 쓰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한다. ‘적폐 청산’은 특정 세력(인물들)을 겨냥하는 것으로 비치지만, ‘적폐구조 청산’은 적폐를 온존케 했던 구조(시스템)를 겨냥하기 때문에 더 합리적이라고 본 것이다. 필자 역시 ‘적폐구조’가 옳았다고 본다. 그랬더라면 정치보복과 반대세력 척결이라는 인상도 덜 줬을 것이다. 하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결과는 모두 아는 바다. 시스템이 아닌, ‘세력’을 싸잡아 적폐로 모니, 지지층에선 ‘토착왜구’라는 무지막지한 말로 호응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나라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누가 그 매듭을 풀까.
‘갈등공화국’의 위대한 조정자가 되어야
집권 3년간 우리는 문 대통령에게 침묵이 뭘 의미하는지 웬만큼은 알게 됐다. 말은 안하지만 대통령의 마음은 이미 어느 한쪽으로 향해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침묵이 더 많은 걸 말해 줄 때도 있다. 박원순 사건과 백선엽 장군의 타계 앞에서 보여준 침묵 역시 그렇다. 희한하게도 이 정권 사람들은 반대세력을 지지 세력으로 바꾸는 일엔 관심이 없다. 지레 포기해서인가, 아니면 섞이고 싶지 않아서인가.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오직 ‘빠’로 표현되는 지지층의 이탈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이 지지층을 겁내 침묵한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대통령은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 자신도 취임사에서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 한분 한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박원순 사건에 대한 언급은 결국 정세균 총리로부터 나왔다. 정 총리는 열흘도 다 된 지난 19일 한 방송에서 “국민께 송구하다. 피해자에게도 심심한 위로 말씀을 드린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하겠다”고 했다. 총리의 백 마디 말이 대통령의 한 마디만 하겠는가.
대통령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줬으면 한다. 민감한 문제일수록 대통령이 직접 국민과 마주해야 한다. ‘갈등공화국 대한민국’에 어찌 좋은 일만 있겠는가. 좋지 않은 일은 일대로 국민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때로는 언론의 과도한 비판도 있겠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선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 국민도 이제는 안다. 언론마다 보도의 내용과 지향하는 효과가 비판의 수위와 항상 함께 가지는 않는다는 것쯤은. 언론을 떠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국민이 대통령의 생각을 알고 싶어 한다는 데 있다. 다시 취임사다. “저는 군림하고 통치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화하고 소통하는, 친구 같은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대통령이 ‘갈등공화국 대한민국’의 조정자, 중재자가 되지 않으면 누가 그 역할을 할까. 북-미 양국을 중재(조정)해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대통령이다. 비록 상호 간 의도와 목적에 대한 이해 부족 탓에 결실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 자체만으로 의의가 작지 않다. ‘위대한 조정자’(촉진자 · Great Facilitator) 소리를 들을 만하다. 그런 대통령이 국내 갈등 하나 조정하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는가. 설령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문제라고 해도 말이다.
침묵으로 일관해서는 대화와 설득을 통해 갈등을 조정하고, 타협과 화합을 이끌어내는 대통령이 되기는 어렵다. 대통령은 16일 국회 개원연설에서 협치를 강조했다. 4당 간 협치를 상징하기 위해 각 당의 색깔인 파랑, 분홍, 노랑, 주황색이 들어가는 넥타이까지 맸다. 대통령은 “협치도 서로 손바닥이 마주쳐야 가능하다”면서 “누구 탓할 것도 없이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공동 책임”이라고 했다. “누구 탓할 것도 없다”는 대목에서 문 대통령 특유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이제라도 내미는 대통령의 손이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손이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