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으로 시작된 인종차별 없애기 운동이 피부색 차별(colorism) 반대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세계 최대 화장품사인 프랑스 로레알은 제품 이름과 설명에 '화이트닝(whitening, 미백)'이란 표현을 쓰지 않기로 했다. 유럽기업 유니레버도 미백용 크림인 '페어앤러블리(Fair and lovely, 흰 살결에 사랑스런)' 제품명을 바꾸기로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세계 미백시장은 수십 조 달러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시장이다. 피부색에 대한 인류의 뿌리깊은 인식이 교정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하얀 시장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인간의 원래 피부색은 검은 색이었다. 아프리카에서 태동한 인류는 털이 비교적 적은 상태에서 강한 자외선을 받아야 했기에 신체의 보호를 위해 멜라닌을 합성한 검은 피부를 갖게 된 것이다. 인류가 아시아와 유럽 북쪽으로 퍼져나가면서 피부의 환경이 달라졌다. 위도가 높은 지역은 자외선의 양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햇빛 속에 들어있는 비타민D를 충분히 합성할 수 없었다. 이것이 멜라닌의 생성을 억제하고 탈색을 일으켜 피부의 색깔이 하얘졌다고 한다.
백설공주는 북유럽의 민담으로 1812년 독일의 그림형제가 편집한 동화 속에 들어가 있다. '백설공주(Snow White)'는 살결이 눈처럼 희다는 뜻이다. 겨울날 왕비가 검은 비단으로 된 창틀 옆에 앉아 남편인 왕의 셔츠를 바느질하다가 하얀 눈을 바라보는 바람에 손가락을 찔렀다. 세 방울의 피가 눈 위에 떨어진다. 왕비는 떨어진 핏방울을 보며 소원을 빈다. 눈처럼 하얀 피부와 피처럼 새빨간 입술, 자수틀의 흑단같이 검은 머리칼을 지닌 아이를 낳도록 해주세요. 아이를 낳은 뒤 왕비는 죽고, 새 왕비가 들어온다.
백설공주보다 덜 하얀 여자의 저주
백설공주가 지닌 아름다움의 핵심은, 그 이름에 이미 밝혀놓은 것처럼 '흰 피부'이다. 북유럽의 낮은 햇빛조도 속에서 태어난 하얀 살결은 눈부신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이 동화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이란 표현에서 보듯 여성의 미(美)에 대한 경쟁심이 긴장구도를 이룬다. 최고의 미와 그 다음의 미 사이에서 일어나는 질투가 살인행각까지도 서슴지 않는 광기로 이어진다. 이 동화는 미백(美白, 흰 빛은 아름답다)신화를 극한으로 끌어올려 동심에 뼛속 깊이 각인시키는 위력을 발휘해왔다. 왜 하얀 피부는 아름다운가. 이 기본적인 의문을 던질 새도 없이, 미백신화를 어린 날 젖처럼 받아먹었다.
7살 소녀의 피부와 아름다움에서 세계 1,2위를 다투는 20대 여성의 구도는, 피부색이야 말로 인간의 우열을 가리는 가장 선명한 질서임을 환기시킨다. 이른 바 미백의 권력이다. 왕비의 핍박을 받던 공주는, 결국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뒤 잘 생긴 왕자와 결혼을 한다. 그 결혼식에 새 엄마 왕비가 초대된다. 왕비의 거울은 자기보다 오늘 결혼한 신부가 더 아름답다고 말해준다. 왕비는 분노 때문에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다. 그때 사람들이 벌겋게 달궈놓은 무쇠신발을 그녀에게 신겨서 쓰러져 죽을 때까지 춤을 추게 한다. 그녀의 악행에 대한 민심의 처벌이지만, 최고의 아름다움에 질투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우스꽝스러운 춤이야 말로, 아름다움의 전쟁에서 진 자를 향한 잔인한 조롱이다.
살색 크레용은 왜 사라졌는가
살색이란 색깔 명칭이 있었다. 2001년 8월 국가인권위원회는 특정 색상을 사람의 피부색을 가리키는 살색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종차별 발상이라고 판단해 바꾸도록 권고한다. 다음해 11월 한국기술표준원은 이 색상명을 삭제한 뒤 연주황이란 명칭을 도입했다. 그런데 연주황이란 이름이 너무 어려워 무슨 색깔인지 모르겠다는 불평이 나왔다. 2004년 8월 초중등학생 6명이 진정서를 내서 색상 명칭을 바꿔달라고 건의했다. 이 색깔은 다시 살구색으로 바뀐다. 문제는 진짜 살구의 빛깔은 노란 빛을 띤 주황으로 '살색'의 색상과는 꽤 다르다는 점이다. 살색과 살구색과 연주황은 모두 표준어로 사전에 올라와 있다.
일본에서도 살색이란 의미의 はだいろ(하다이로)를 쓴다. 이 나라에서도 비판적 지적이 있어서 연주황(うすだいだい, 우스다이다이)이나 페일 오렌지(ペールオレンジ)란 명칭으로 바꿔쓰기도 하지만, 여전히 하다이로가 표준어다.
세계화는 인류의 '살색'의 원형을 모두 백색으로 잡고 거기에서 우열의 줄을 세우는 기이한 문화현상을 일상화해왔다. 텔레비전에서 '하얘지세요'라는 화장품CF가 공공연히 등장했던 한국은 미백에 대한 동경이 유난한 나라다. 고속성장을 타고 인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도 커졌다. '우윳빛깔' '꿀피부' '백색미녀'와 같은 말이 일상어가 됐다. 한 건강잡지에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미백이다. 얼굴이 하얗고 밝아야 마치 광채를 내는 듯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방탄소년단은 '백인'을 연기?
방탄소년단 멤버는 하나같이 '백설소년'이다. 유럽과 미국에선 이런 하얀 미남들을 '화이트워싱(whitewashing,영화에서 유색인종의 실제 인물을 백인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라고 조롱하기도 한다. 하얀 껍데기를 썼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인도에선 흰 피부가 성공의 상징이다. 영국 식민통치 때 상대적으로 하얀 얼굴의 현지인을 많이 고용했기 때문이다. 남미에선 피부색이 거의 정확하게 권력서열이다. 맨 상층부에 백인이 있고 맨 아래에 검은 피부의 토착민, 그리고 가운데에 혼혈들이 자리매김된다.
코로나시대를 맞아 얼굴을 거의 가리는 마스크가 일상화되면서 '백설공주'들 또한 마스크 속에 묻혔다. 미국발 인종차별 철폐 바람이 미백에 대한 오래된 신화를 깬다면, 마스크를 벗을 때 쯤엔 다른 미인으로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백설공주야 말로 북구의 침침한 하늘이 빚은 창백한 납덩어리의 미학이라면서 동화책의 맹신을 내던지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코로나 이후 인류에게 미황(美黃)과 미흑(美黑)의 화장품들이 쏟아지는 상상을 해본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가장 아름답니? 예, 어떤 살색의 얼굴이라도 예쁘죠. 마술거울이 AI처럼 진화해 대답프로그램을 바꿀지도 모른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