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의 단초가 된 대북 삐라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게 우선 중요하다. 삐라의 힘은 생각보다 세다. 북 주민들에게 김씨 왕조의 치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10여년 전, ‘우리의 핵무기 삐라’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2008년 12월 8일자 동아일보). 글은 김정일 국무위원장(2011년 사망)의 출생 신화 ‘향도성(嚮導星)의 전설’로부터 시작된다. “1942년 2월 백두산을 오르던 한 백발노인에게 하늘에서 제비가 내려와 ‘이 자리에서 온 세계를 지배할 비범한 장군이 태어날 것’이라고 알려줬다. 그 예언대로 2월 16일 백두산 정상에 떠오른 향도성이 정일봉(正日峰) 위로 황홀한 빛을 비추자 김 위원장이 태어났다.”
북 언론은 “그런 김 위원장을 세계의 인민은 너무도 흠모해 160개 나라에서 명장 중의 명장, 불세출의 영웅, 성인 중의 성인, 우리 행성의 수호신, 철학의 거장, 음악의 천재, 만민의 하늘, 21세기 인류의 태양 등 무려 1200여개 호칭으로 불린다”고 한다. 이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하겠지만 북에선 그렇게 믿는다. 그런 지도자가 대북 삐라로 인해 흠결 많은 평범한 독재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북의 표현대로 ‘영도(領導)의 유일중심(唯一中心)’이 흔들려 체제 유지가 힘들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다르지 않다. 그는 아버지보다 훨씬 젊은 나이인 29세(2013년)에 ‘위대한 영도자’의 지위에 올랐다.
우리의 핵무기는 삐라다
요즘 삐라의 위력은 탈북외교관 출신 태영호씨와 꽃제비 출신 지성호씨가 국회의원이 되면서 더 세졌다. 북은 이 두 의원을 ‘삐라 플러스 알파’로 본다. 삐라의 내용을 뒷받침함으로써 암암리에 김정은·김여정, 두 백두혈통에 대한 부정과 망신주기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에선 대북 전단 살포 금지법을 만들자는 얘기도 나온다. 쉽지 않은 일이다. 헌법을 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헌법은 북한도 우리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다(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 헌법상 같은 영토에 사는 국민이 다른 국민에게 의사표시를 하는 걸 막을 수는 없다. 표현의 자유에 위배된다. 전단 살포가 죄가 되려면 한·중 관계처럼 북이 별개의 국가여야 한다. 우리가 한·중 국경지역에서 반중(反中) 전단을 살포하면 즉시 체포되듯이 말이다. 임시헌법의 틀을 씌울 수도 있다. 기존 영토조항을 빼고 ‘실효지배’로 하되, 통일이 될 때까지 한정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전단 금지법은 국가보안법과도 상충된다. 보안법상 반국가단체인 북한에 대해 의사표시를 못하게 하는 것은 모순이다. 통일부는 뒤늦게 남북교류협력법으로도 처벌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군색하다. 진작 관련 법 체계를 손봤어야 했다.
송영길 민주당의원에 따르면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도 정부가 8차례나 대북 전단 살포를 저지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정권에선 2차례에 그쳤다. 대북 전단이 문제가 될 걸 몰랐다면 무능한 거고, 알고서도 소극적으로 대처해 불씨를 키웠다면 직무유기다. 이러니 ‘김여정 하명법’이란 말이 나오는 것이다. 아날로그 식 삐라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코앞에 다가온 ‘디지털 삐라 시대’엔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하다.
‘G7급 국가’가 北의 조롱에 대꾸도 못해
보다 중요한 것은 대북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다. 이 정권 사람들은 남북관계에 대단한 이정표를 세운 것으로 알지만 착각이다. 세 차례 정상회담의 ‘성과’로 뇌리에 남아있는 것은 ‘이벤트’밖에 없다. 이벤트의 대가(代價)로 잃은 것은 실로 많다. 한·미군사훈련의 축소로 한·미동맹은 이완됐고, 9·19 군사합의로 대북 대비태세는 약화됐다. 무엇보다 국가적 자존심이 휴지처럼 구겨졌다. ‘G7급 국가’가 어쩌다 천박한 막말과 조롱에 대꾸 한 번 못하는 처지가 됐을까. 오죽 우습게 봤으면 냉면집(옥류관) 주방장 따위가 우리 대통령을 조롱할까.
북의 속내와 수법은 너무 뻔해 이젠 짜증이 날 정도다. 북은 북·미, 남북 간 ‘빈 손 정상회담’에 대한 주민들의 실망과 경제난 및 코로나로 야기된 불만을 해소할 분출구로 문 대통령을 이용했다. “정상회담으로 요란만 떨었지 그게 인민의 삶에 무슨 도움이 됐느냐”는 주민들의 불만은 김정은에게로 향해야 맞는다. 그걸 문 대통령에게로 돌린 것이다. 주민들의 실망감을 대남 적개심으로 재빨리 치환하는 건 대대손손 김씨 일가의 장기(長技)다.
물론 거기엔 문 대통령에 대한 분노도 얹혀 있다. 대북 제재 해제에 아무런 도움도 안 주고, 그렇다고 독자적으로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허락 없이 ‘평화’라는 말을 쓴 데 대한 분노다. 평화? 내 미사일 한 방이면 날아가버릴 ‘평화’를 돈 한 푼 안내고 써? 용납 못 한다는 거다. 대남 규탄시위를 ‘반미(反美)투쟁월간’인 6월 25일∼7월 27일(조국통일 승리기념일)로 잡은 것이나, 냉면집 주방장을 동원해 적개심의 폭발적 확산을 노린 고도의 심리전(우리로 치면 개념예능)까지, 가히 명불허전이다. 마지막엔 이용가치가 떨어지는 사람은 성난 군중에게 내주는 것까지. 이런 행태는 순수하고 선의(善意)와 열정으로 충만한 문 대통령과 대조를 이룬다.
‘상호주의’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정부 여당은 지금이라도 상호주의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민주당 사람들은 ‘상호주의’란 말만 들어도 기겁을 하지만, 이는 상호주의에 대한 이해부족 탓이다. 상호주의는 사인(私人) 간이건, 국가 간이건 모든 관계의 기본이다. 대외관계를 상호주의에 기초하지 않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다만, 국가 간에 부(富)와 능력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걸 고려해 형식과 내용을 조정할 뿐이다. 1대1의 기계적 상호주의란 현실에선 존재하기 어렵다.
서로 주고받는 게 양(量)이라면 계량을 통해 1대1 교환도 가능하겠지만, 질(質)이라면 사정은 다를 것이다. ‘남북관계’라는 말 속에 이미 ‘상호’(서로)라는 의미가 내재돼 있다. ‘상호’가 없다면 ‘관계’도 없다. 문 정권은 상호주의로 가되 북한의 형편을 고려해 북을 감싸안는 상호주의로 가야 한다. 그런 상호주의를 나는 ‘포용적 상호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이 정권의 국정 철학과 방향도 포용이다. 대북정책도 당연히 포용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포용하되 상호주의를 지키는 ‘포용적 상호주의’의 기초 위에 대북정책을 올려놓아야 한다. ‘포용적 상호주의’라야 남북 간에 최소한의 신의와 예의를 지키면서 실질적인 관계개선도 이룰 수 있다. 지속가능한 대북정책이 비로소 작동되는 것이다.
연락사무소 폭파에 대해 청와대는 17일 “상황을 계속 악화시키면 강력 대응하겠다”고 엄중 경고했다. 만시지탄이지만 바른 판단이다. 튼튼한 안보의 바탕 위에서 대화를 추진하듯이, 상대의 도발, 오판, 비례(非禮)에 대해선 엄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면서 도울 것은 돕고 줄 것은 줘야 한다. 그래야 오래오래 도울 수가 있다. 그게 인간세상의 도리이자 순리가 아닌가. 사태가 이 지경이 됐는데도 민주당에선 “우리 책임이 크다”, “대포로 폭파 안 한 게 어디냐” 같은 소리들이 나왔다고 한다. 집권당이 그런 인식과 언행을 보이니까, 다른 쪽에선 “북의 도발은 힘들다는 신호, 제재를 지키면 핵 포기의 길이 열린다”와 같은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제재의 끝이 핵 포기일지, 전쟁일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면 북을 그런 식으로 길들여온 사람들의 책임이 먼저다. 북을 ‘응석받이’로 만든 사람들이 누구인가. 거기에 맛들이도록 긴 세월 북을 스포일(spoil)시켜온 게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삐라 소동과 무도한 폭파행위의 본질이다. 이제라도 포용적 상호주의, 포용하되 상호주의의 원칙은 지킴으로써 좌든 우든 김정은의 행태를 질정(叱正)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