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아픈 나라’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 체념 또는 막장을 연상케 한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란 말과 같다. 아마 자신들을 이렇게 여기는 것을 안다면 불쾌할 것이다. 책은 일방적으로 일본을 깎아내리는 데 힘을 쏟지 않는다. 반면교사로 삼자는 의도가 엿보인다. 저자 또한 “책을 읽다 보면 ‘한국이 더 심한데’라고 느낄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럴 때 우리를 돌아보자고 제안한다.
몇 가지만 보자. 우선 약자를 괴롭히는 병리적 심리 상태다. 마을 전체가 특정인을 집단으로 따돌리는 무라하치부(村八分)를 예로 든다. 무라하치부는 촌락사회에서 징벌 수단으로 시작됐다. 여기에 해당되면 결혼 등 8가지 일에서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다.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다. 공동체 사회에서 이보다 가혹한 징벌은 없다. 이런 전통은 오늘날 약자를 따돌리는 이지메로 발전해 일본을 병들게 하고 있다.
개인보다 집단을 중요시하는 전체주의도 커다란 해악이다. 집단주의와 전체주의는 광기 어린 전쟁으로 이어졌다. 집단이 내린 결정에 반대하지 못하는 조직은 맹목적이다. 카르텔, 파벌 정치도 병폐다. 2017년 중의원 당선자 4명 중 1명이 세습 의원이다. 당시 언론은 전체 25%, 120명을 세습 의원이라고 보도했다. 자민당은 무려 33%에 달했다. 이런 정치문화 속에서 일본은 병들고, 우경화는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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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풍토도 건강한 편에 속한다. 총선 때마다 물갈이는 단골 메뉴다. 21대 총선에선 절반 이상(151명) 바뀌었다. 청년과 여성 정치인도 약진했다. 20·30세대는 13명으로, 4배 이상 늘었다. 여성 국회의원도 57명으로 역대 최고다. 세습에 대한 저항감도 거세다. 현직 국회의장 아들조차 세습 논란에 휩싸여 공천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아재 국회’와 ‘꼰대 국회’를 우려할 정도로 건강하다.
29일부터 21대 국회가 시작된다. 그런데 과반 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이 곤혹스런 입장에 처했다. 비례대표 당선인 두 사람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한 명인 양정숙 당선인은 발 빠르게 제명함으로써 불씨를 차단했다. 하지만 윤미향 당선인을 둘러싼 불길은 계속해서 타고 있다. 회계 부정과 기부금 횡령 의혹을 받는 윤 당선인은 갈수록 심각하다. 이용수 할머니는 25일 기자회견에서도 윤 당선인을 강하게 성토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정의연’이 위안부 할머니를 팔아먹었다. 윤 당선인은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총선에 출마했다”면서 “수사결과를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며 울먹였다. 윤 당선인이 찾아와 용서를 구한 것에 대해서도 “가짜 눈물이며, 용서할 가치도 없다”고 일축했다. 무엇이 할머니를 이렇게 분노하게 했는지 우리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서운함에 의존한 과장된 비난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억 왜곡” 운운하며 본질을 흐려서는 안 된다.
나아가 이번 일로 위안부 운동이 훼손되거나 중단되어서도 안 된다. 제기된 의혹에 대한 진상 규명은 당연하다. 윤 당선인의 해명은 오락가락하며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진솔한 해명과 진퇴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검찰 수사까지 착수한 마당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머뭇거리고 있다. 이날도 “수사 결과를 지켜보고 향후 입장을 결정하겠다”고 했다. 온정적으로 끌고 갈 때가 아니다. 미적대다간 더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
이해찬 대표는 “개별 의견을 분출하지 말라”며 당내 비판을 단속했다. 내부에서는 조국 사태 판박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정치를 잘했다는 당 태종. 그는 내부 비판을 중시했다. 태종은 “거울이 없으면 자신을 볼 수 없듯이 간언이 없다면 정치적 득실을 알 방법이 없다”며 쓴소리에 관대했다. 또 “최초의 긴장감을 지속시켜야 한다”는 말로 오만함을 경고했다.
국민들은 민주당에 177석이란 압도적 승리를 안겼다. 민주당 지도부는 “겸손하겠다”고 약속했다. 민심을 살피고 쓴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건강한 민주당을 기대할 수 있다. “아픈 나라, 병든 정치” 일본과 확연히 구분되는 지점도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