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뷰] 금융권에 부는 '연기금 사회주의' 바람

2020-05-0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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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 금융부 팀장

앞으로 국내 금융지주 주주총회에서는 선거전이 치열해질 것 같다. 지난 3월 금융사 주주총회 시즌 당시 국민연금은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과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 반대 의사를 공식화했다.

물론 곧 이어진 주주총회 투표 결과 두 회장은 우호적인 주주들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서 무난히 연임에 성공했다. 올해 국민연금의 반대는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친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될 수 있는 국민연금의 반대표 활용에 두려움을 느낀 금융사 고위 임원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 금융권에서는 반대표를 던진 국민연금에 대한 비판을 쉽게 들어볼 수 있다.

유독 금융권이 시끄러운 것은 그만큼 금융권이 국민연금에 큰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민연금은 7개 금융지주(신한·KB·하나·우리·BNK·JB·DGB)에 5%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중 5개 금융지주(신한·KB·하나·BNK·DGB)에서는 최대주주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금융 역시 완전 민영화를 거쳐 예금보험공사의 지분이 모두 매각되면 국민연금이 최대주주로 올라서게 된다.

금융지주계열이 아닌 금융사도 마찬가지다. 국민연금은 삼성증권, NH투자증권, 키움증권, 코리안리, DB손해보험 지분을 10% 이상 보유하고 있다. 삼성생명, 삼성화재, 미래에셋대우, 현대해상, 메리츠화재 등의 지분도 5% 이상 보유하고 있다.

이를 감안하면, 국민연금은 각 권역을 대표하는 금융사의 최대주주이거나 주요 주주로 경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셈이다. 때문에 금융권 관계자들이 국민연금의 행보에 온갖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처지다.

국민연금이 이토록 막강한 지배력을 갖고 있었다면 왜 지금에서야 주주총회 반대표 문제가 나오는 것일까? 이는 국민연금 같은 연기금과 기관투자자의 주주권 행사가 사실 얼마 전부터 시작된 탓이다.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는 물론 자본주의 선진국들도 대부분 소위 '월스트리트 룰(Wall Street Rule)'을 따랐다. 투자기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의결권을 행사하는 대신 해당 주식을 매각해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월스트리트 룰이다. 이른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방식이다.

사태가 급변한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다. 당시 미국의 초저금리 정책 중단 후 시작된 부동산 가격 하락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로 이어졌다. 이때까지 이를 활용해 돈을 벌었던 투자은행 등 상당수 금융기관은 연쇄적 파산을 겪으면서 결국 글로벌 금융위기로 문제가 커졌다.

결국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투자은행 등 금융기관의 부실이 기업지배구조의 취약성과 주주들의 무관심에서 비롯됐다는 자성의 목소리에서 변화가 시작됐다. 월스트리트 룰과 상당히 차이가 있는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가 나타난 것이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문자 그대로 '집사(steward·관리인)의 규범'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좀 더 부드럽게 풀어보자면, 타인을 대리해 자산을 관리하는 수탁자가 지켜야 하는 원칙을 의미한다. 즉, 수탁자인 연기금이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통해 돈을 맡긴 위탁자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에 따라 경영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스튜어드십 코드에 대한 저항도 적지 않다. 금융권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정부가 국민연금을 통해 기업을 통제하고 경영에 간섭하는 속칭 '연기금 사회주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 아니냐는 시선에서다.

물론 연기금 사회주의에 대한 우려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연기금이 정부에서 완전한 독립성을 확보하지 않은 상황에서 스튜어드십 코드를 섣불리 도입할 경우 정치권력의 영향력 아래 기업이 짓눌릴 수밖에 없다는 시각에서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나라보다 자본주의의 역사가 훨씬 긴 선진국에서 더욱 공공연하게 연기금 사회주의가 발전했다는 사실은 함구한다.

실제 세계 최대 규모 자산운용사인 블랙록(BlackRock)의 경우 미국 상장회사에 대한 의결권 행사 가이드라인을 통해 이사회 독립성 및 다양성, 이사의 과도한 겸직 반대 및 보수 환수제안 등 다양한 주주제안 및 의결권 행사를 실행하고 있다. 그 외 AP(스웨덴), APG(네덜란드), CPPIB(캐나다), NBIM(노르웨이) 등 다양한 연기금들도 활발한 주주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국민연금을 포함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연기금이 바라는 것은 금융지주 회장 몇몇의 진퇴 문제가 아니다. 국민 노후자금 수탁자로서 기금과 우리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투명한 기업 지배구조와 금융 시스템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2014년 카드사 고객정보 유출과 2016년 2금융권 육류담보대출 사기사건, 2018년 삼성증권 배당오류 사건, 지난해 해외금리 연계 파생금융상품(DLF) 사태 등 굵직한 금융사고가 1~2년마다 발생하는 것을 감안하면 연기금의 바람이 전혀 근거 없는 경영 간섭에 불과한 것인지 금융사 관계자들에게 되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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