꺄… 개 재미있다! 동네 공원에서 산책을 하던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열살 좀 넘은 듯한 소녀들이 언덕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내려오며 지르는 탄성이다. 허걱! 여기서 왜 개가? 그리고 밀려오는 자괴감. 나 자신도 언어생활 속에서 개라는 동물을 얼마나 인용했던가? 청소년들의 비속어가 사회문제라고 하지만, 이는 청소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똑똑해 보이는 젊은 여성들이 회사일을 이야기하며 ‘팽이를 돌린다’라거나 상사가 ‘까라면 까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놀란다. 이는 모두 군대의 남성 비속어로서 상관의 명령이라면 남성의 성기로 팽이를 돌린다거나 밤송이를 까는 불가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문화는 지정학적으로 척박하고 신분의 차별이 심했던 한반도의 사람들이 오랜 세월 속에서 체화한 것인지 모른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이 애정이나 근심을 담아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문학이나 인류학을 하는 학자들은 욕과 해학을 한국문화의 핵심적 요소로 보기도 한다. 국문학자이자 민속학자인 김열규는 욕에 응축되는 해학을 한국인의 ‘카타르시스’라고 하였다.
한국이 욕과 해학의 해방구라고 한다면 일본은 저 반대편에 있는 재판정과 같이 엄숙한 분위기이다. 한국의 욕과 해학이 가장 밀도있게 응축되는 예로 형용사를 한층 강조하는 부사를 들어본다. ‘매우’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부사를 한국어에서 찾는다면 부지기수이다. 무지하게, 엄청나게, 굉장하게, 어마어마하게 등등의 ‘표준어’에 이어 '겁나게', '허벌나게', '억수로' 등의 방언을 거쳐 ‘존나게’와 앞서 말한 ‘개’에 이르는 풍부한 메뉴가 있다.
그렇다면 일본어에서는 어떠한가? 재미있는 정도를 강조하기 위하여 부사가 필요하다면 교과서에서는 とても(도테모)이고, 이십대 이상의 사람들은 대개 滅茶(메차)라고 할 것이며, 한국에서의 ‘개’에 해당하는 청소년의 비속어에 해당하는 것은 超(초)라고 할 것이다. 滅茶(메차)는 사리에 안맞게 도가 지나치다는 의미이고, 초는 한자어 그대로 초월한다는 것이다. 더러 凄く(스고쿠, 처절하게)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도 있으나 최근에는 줄어들고 있다. 그 외의 부사를 사전에서 찾고자 한다면 있겠지만 일상생활에서 들을 수 있는 부사는 이 정도이다.
언어와 육체
언어는 인간이 자신이 속하는 문화나 문명을 표현하는 도구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언어는 그 자신이나 그가 속하는 문화권을 대표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한 점에서 일본과 한국의 언어는 매우 대조적이다. 특히, 인격체가 담겨 있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는 육체가 인지하는 오감의 표현에 있어 일본어와 한국어는 차원이 다르다고 느낀다.
일본어의 표현은 한국어에 비하여 담백하고 단순하고 얌전하다. 라면을 한 그릇 맛있게 먹은 일본의 건달은 그저 ‘맛있다’라고 하겠지만, 한국의 건달은 ‘죽여준다’라고 해야 신분과 분위기에 맞는다. 일본에서 형용사를 강조하기 위한 부사에 인간의 육체가 등장하는 일이 없는 반면에, 한국어에서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등장한다.
이러한 비교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육담(肉談)의 유무이다. 주로 성(性)에 관한 소재로 꾸며진 민담이기에 외설담이라고도 불리는 이 개념이 일본어에는 없다. 흔히 음담패설이라고 불리는 이 육담은 한국에서는 지금도 유행하고 있다. 외설적이라기보다는 친근함을 표현하는 에로티시즘의 사회적 표출이라고 생각한다.
위와 같이 인간의 육체에 관한 관심이 언어에 반영되는 정도에 있어 한·일간에 큰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주제에 관하여 전문적인 연구를 하지 않은 필자가 한국인으로서 오랫동안 일본을 관찰하여 이른 결론은 한국인이 더 신체적이라는 것이다. 즉, 신체에 대한 관심이 일본인보다 강하며, 그 결과일지 모르지만 신체적인 조건이 더 우수하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다름아닌 식습관과 음식의 문화이다. 영어표현의 what you eat is what you are에 잘 표현되어 있듯이, 육체의 물리적, 화학적 조건은 음식으로 결정된다.
오늘날을 사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식습관을 비교해보면 아래의 OECD 통계조사가 보여주듯이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20% 더 칼로리와 알코올을 섭취하며 그 결과 30% 더 비만하다. 따라서, 육체적인 경연에서는 한국인이 더 우수하다. 2016년 하계올림픽의 경우, 인구 백만명당 따낸 메달수를 비교해보면 한국인이 30%를 더 따냈다. 일본의 인구가 한국의 2.4배인데, 거의 모든 스포츠종목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앞서고 있다.
OECD통계로 본 한국인과 일본인 (2017년)
한국인의 식습관이 일본인보다 우수한 것은 역사가 길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사회가 어려운 시기를 보내던 기간을 제외하고, 역사의 긴 흐름 속에서 한반도의 사람들은 일본열도 사람보다 단백질, 특히 동물성 단백질의 섭취에 있어 훨씬 앞서 있었다. 전국한우협회의 자료를 보면,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미 육식을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육식문화가 꽃피웠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도 즐기는 갈비탕, 전골, 육개장, 불고기 등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그러나 그런 칼로리가 풍부한 음식은 지금도 일본에서 발견할 수 없다. 일본에 가서 먹을 수 있는 스키야키, 돈가스, 소고기덮밥, 야키니쿠, 샤부샤부 등은 모두 전후에 도입된 ‘외국음식’이다. 특히, 소고기덮밥(규돈부리)는 전후에 결핵이 만연하자, 육식을 권장하기 위해 정부가 추진한 대중식품이다.
일본인도 같은 본능을 가졌으므로, 고기를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강한 불교의 영향, 그리고 675년의 천무천황에 의한 육식금지령(소, 말, 원숭이, 개, 닭) 이후 일본열도에서는 한반도에서와 같은 대중적인 육식문화가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소와 돼지를 중심으로 하는 가축의 습관이 형성되지 않고, 따라서 전반적으로 육식재료 공급이 제한되어 있었다. 산돼지, 사슴, 새고기 등은 농촌에서 잡히는 대로 먹었으나, 이는 한반도 사람들이 형편만 되면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던 소고기나 돼지고기와 양과 질에 있어 비교할 수 없었다.
그 반면에 번성한 것이 콩단백질 문화로, 지금도 일본인들에게 된장과 간장은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지금은 흔히 먹을 수 있는 사시미를 중심으로 하는 생선도 유통루트가 없었던 과거에는 바닷가 사람들과 도시의 부유층만이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일본인들이 메밀국수(소바)의 남은 간장국물을 소리를 내어 모조리 들이켜는 행동은 그 국물이 소중한 단백질이었던 때부터의 습관이다.
육체와 혼령
수천년을 통하여 단백질을 더 섭취한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신체조건이 좋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극단적인 이분법으로 한반도의 문명과 일본열도의 문명을 가른다면, 전자는 육(肉)의 문명이고 후자는 혼(魂)의 문명이라고 볼 수 있다. 표에 인용되어 있듯이,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운동도 잘하고 폭력을 더 쓰며,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더 많이 하며, 그 욕망이 담긴 자신의 육체에 해를 가하기도 한다.
한국인에게 혼이라는 어휘는 성스럽거나 학교 등에서 수시로 접하는 표현이 아니다. ‘잘못하고 혼이났다’ 정도이다. 그러나 일본인에게 혼이란 성스럽고 고귀한 어휘이다. 그들은 지금도 천황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천황은 일본인의 혼이 담긴 그릇(魂の容れ物)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또 다른 예로, 일본의 근대화를 다루는 담론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표현이 화혼양재(和魂洋才)이다. 명치유신으로 일본이 문호를 개방한 후, 서양의 기술과 엑스퍼티즈를 들여와 일본의 혼, 즉 가치체계와 혼합시킨 것이 오늘날의 일본이라는 말이다. 이 말에 동의한다는 것이 아니고, 일본인들이 가지는 魂이라는 개념에 대한 집착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본인의 혼이란 무엇인가? 힌트를 볼 수 있는 용어가 하나 있다. 대만인이 사용하는 ‘닛푼쳉신’이라는 말이 있다. 한자로는 日本精神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은 대만에는 한국인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일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만인의 일본예찬을 압축하는 말이 바로 日本精神이다. 일본대만평화기금이라는 단체가 공표한 日本精神의 설명에 의하면, 이 어휘는“대만에서 만든 말로서, 일본인의 정직, 성실, 청결, 공정, 근면, 책임감, 규율준수, 신뢰 등을 가리키는 어휘”라는 것이다. 흔히 ‘일본예찬’에 나열되는 덕목들이다.
이 관찰을 인용하는 이유는 일본문화 내지는 문명의 요체가 정신적 측면이지 신체적, 물리적 측면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칭찬도 비판도 아니다. 일본인이 지금도 질서를 잘 지키는 것과 대지진으로 가족을 다 잃은 사내가 땅을 치며 울기는커녕 멀뚱멀뚱하게 인터뷰에 응하는 장면을 보며, 나는 감정이 없는 헝겊인형을 연상하였다. 혼의 문명에서 태어나 평생을 사는 일본인들은 육의 문명에서 태어나 평생을 사는 한국인보다 신체적인 조건이 열등하며, 정신의 발현인 태도가 소극적이고 소심하며 욕심이 적다. 그 결과, 질서가 잘 유지된다.
이러한 비교의 한 좋은 예가 시민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타인을 법에 고소하는 통계이다. 2018년의 경우, 인구 5천만의 한국에서는 55만건 이상의 고소가 있었는데, 인구 1억2000의 일본에서는 1만건 정도이다. 인구비례로 보면 일인당 고소건수가 130배 이상이 된다. 이는 법정에서의 위증죄, 남에게 죄를 덮어 쒸우는 무고죄의 경우 더 심하다. 그러나 다른 비교도 있다. 위안부, 징용공 등 과거의 역사를 놓고 두 나라가 갈등하는 사이에도 한국의 연예인들이 행하는 공연에는 일본 최대 공연장들이 늘 만원이다. 세계를 감동시키는 연예인, 운동선수, 영화 등에 있어 인구비례로 보면 한국이 일본을 압도한다.
외형적으로 가장 유사하고 체질적으로도 가까운 한반도의 사람들과 일본열도 사람들의 극적인 대조. 이는 육체를 중시하는 경향과 혼령을 중시하는 경향이 수천년 동안 유지되어온 결과가 아닐까? 육체와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한반도 사람들은 태어난 땅을 ‘비단으로 수놓은 강산’(錦繡江山)이라고 하고, 지진과 해일 등 자연재해의 백화점인 열도의 사람들은 태어난 땅을 ‘신의 나라’(神の国)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