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성착취 동영상 유포사건인 'N번방'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지시하면서 이번 사건을 이렇게 정의했다.
그러나 이번에 수면 위로 드러난 'N번방'은 숱한 '디지털 성범죄' 중에서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다. 최근 수년간만 해도 수없는 여성들이 '디지털 성범죄'로 고통받았다. 그 중에는 이미 세상을 등진 이들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N번방이라는 극단적인 형태의 디지털 성범죄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불법촬영과 유포는 피해자들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있다.
사건이 발생하면 대중과 언론은 반짝 관심을 가지지만, 관심을 가시고 난 뒤에 남겨지는 건 오롯이 피해자 혼자다.
게다가 과거의 관습과 틀에 박혀있는 사법부의 어설픈 판단과 판결 속에서 피해자들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아주경제 법조팀은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로 고통받았고 사건이 수년 전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던 두 여성을 다시 만났다. 매일 절망에 잡아먹히고 있는 두 여자의 삶은 이 땅의 수많은 다른 피해자들의 모습과 너무도 많이 닮았다.
◆매일 털어넣는 정신과 약 4알...."살아갈 의미가 있을까요?"
'뉴프람 5㎎ 2알' '로라반 1㎎ 2알'. '그 사건'을 겪은 이후 한 여성이 매일 먹는 약이다.
이 알약은 항정신성 약물로 기억상실, 진정, 최면작용 등의 특성이 있다. 과다복용할 경우 불안함과 우울증, 환각 등이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루라도 이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자기도 힘들기에 이씨는 수년째 손바닥 위 4개의 알약을 털어넣으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아주경제 법조팀이 이씨를 만난 것은 2년 전이다. 당시 믿었던 지인으로부터 불법촬영 범죄 피해를 입어 재판을 진행하고 있던 이씨의 일상은 이미 엉망이었다.
그래도 가해자의 잘못을 밝히고자 그는 언론에 자신의 사건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억울한 피해를 당한 자신을 경찰이, 사법부가, 언론이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씨의 희망은 깨지고 밟혔다. 경찰도 사법당국도, 심지어는 변호사도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또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은 반짝 관심을 가졌지만 대부분 언론사는 '일부 사례'로 여기며 큰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단지 많은 피해자들 중 한 명 그뿐이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살아갈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요.” 최근에 만난 이씨는 예전보다 훨씬 수척해진 모습으로 말했다.
지난 2018년 서지현 검사 등이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미투운동에 대해 한참 활발히 논의될 때 만났던 이씨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당시에는 성폭력 고발이 사회적 지지를 얻으면서 이씨도 다소 고무됐었다. 자신의 피해가 제대로 밝혀질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법은 끊임없이 가해자보다 집요하게 이씨를 의심했다.
악몽이 시작된 것은 이씨가 수년 전 상속 관련 법적 자문을 위해 자신의 집 주변에 있는 한 법무사를 찾았을 때부터였다.
일면식도 없었던 법무사 문모씨는 이씨와의 법률 상담 중 갑자기 이씨가 다니던 교회의 교장 선생님을 거론했다. 문씨가 언급한 교장 선생님은 인품이 훌륭한 사람으로 평을 받고 있었다. 때문에 이씨는 처음 만남에도 문씨에게 다소 신뢰를 가질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친근한 모습은 잠시, 문씨는 어느 새 '스토커'가 돼 있었다. 이씨의 단호한 거절에도 끊임없이 연락을 해왔다. 특히 이씨를 힘들게 만든 것은 문씨가 보낸 성적인 표현이 담긴 메시지들이었다.
이씨가 강하게 반발할 때면 문씨는 사과했다. 반성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반성도 일시적이고 문씨는 사과와 반성을 반복하는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
2016년 5월, 초여름 날씨로 가볍게 옷을 입어야 했던 날. 문씨는 이씨에게 “그동안 성적인 문자를 보내 미안하다, 이제 안 그러겠다”며 식사를 제안한다.
이씨는 내키지 않았지만, 마지막 식사 자리이며 이 자리를 빌어 더 이상 그가 연락하지 않도록 단호하게 말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를 만났다. 그러나 그 만남이 화근이었다.
근처에서 식사를 할 줄 알았지만, 문씨는 이씨를 태우고 강제로 교외지역을 돌았다. 이씨가 여러 번 ‘집으로 데려다 달라’ ‘내 몸에 절대 손대지 말라’고 확고한 의사표시를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이씨가 사는 동네에서 크게 벗어난 외진 장소의 모텔 앞에 차를 세운 문씨는 갑자기 이씨가 입은 얇은 원피스를 거의 반강제로 벗겨내려는 시도를 했고, 인적이 드물고 도와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씨는 그대로 모텔로 끌려들어가야 했다.
이씨는 울며불며 저항했지만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 채 옷을 다 뺏겼다. 이씨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침대에 엎드려 울음을 터트리는 것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린 핸드폰 ‘찰칵’ 소리. 이씨는 “뭐하는 짓이냐, 사진을 지워라”라고 말했고, 문씨는 “지웠다”고 말했다.
특히나 이 과정에서 문씨는 "내가 법무사인데 법을 위반하는 행동을 하겠느냐"며 이씨를 안심시키려는 말도 여러 차례 꺼냈다.
옷을 되찾고 이씨는 거의 도망치다시피 나오며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문씨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정도의 ‘성적 수치심’이 드는 문자를 끊임없이 보냈다. 이씨는 결국 문씨를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내 나체 사진이 재판부에?... ‘지울 수도 없다는 공포감’
통신매체이용음란 혐의로 넘겨진 재판에서 재판부(안종열 부장판사)는 '문씨와 이씨가 내연 관계에 있었다'는 판단을 근거로 문씨에게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그러나 내연관계라는 부분은 문씨의 일방적인 주장이었고, 오히려 재판에 제출된 문자내용을 보면 내연 관계 사이에서 오고간 것으로는 보기 힘든 내용들이 대부분이라는 게 이씨의 말이다.
당시 문씨가 보낸 카톡에는 “벗으라면 벗고, 입으라면 입지, 대전까지 가서 하니 안 하니 지랄하는 애가 어디 있어.. 사람 몸살나게···” “한 번 잡아먹는 게 왜 이리 힘드노” 등의 대화 내용이 담겨있었다.
문씨가 보낸 문자 내용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수준으로, 여성을 원색적으로 비하하거나 여성의 성기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등의 내용도 포함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단순히 이씨가 문자와 사진만으로 고소를 진행했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진짜 성폭력을 당했다면 강간 등의 혐의로 왜 고소를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사건 발생 당시 활발한 사회생활을 하고 있던 이씨는 강간 재판에 휘말리는 게 부담스러웠다.
대부분의 성폭력 피해자들처럼 이씨 역시 자신이 피해를 입었음에도 되레 사회적으로 축출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다른 재판도 아니고 강간 관련일 경우 소문이 나면 결국 직장에서 잘리게 되고, 그게 너무 무서웠어요"라고 이씨는 말했다.
그러나 강간 혐의로 고소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엉뚱하게 문씨와 자신이 연인 사이였다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됐다. 이씨의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결국 재판이 시작되자 문씨는 자신과 이씨의 관계는 연인 사이였고, 오히려 이씨가 자신을 꼬시려고 접근한 이른바 ‘꽃뱀’이라고 주장했다.
기가 막힌 이씨는 문씨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증거를 제출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사람은 내가 자기랑 무슨 연주회에 다니고, 함께 다녔다고 주장했지만 저는 그 시간에 마트에 있었어요. 너무 억울해서 영수증까지 제출했지만 재판부에서는 이를 제대로 받아들여주지 않았어요."
이씨는 두툼한 서류봉투 속에서 첨부한 영수증 사본을 내밀며 말했다. 너무도 억울해 자신이 문씨와 함께 있지 않았다는 증거를 시간 단위까지 표시해 자세하게 만들어 제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씨를 절망하게 한 것은 자신도 몰랐던 불법촬영물이 오히려 문씨와 자신이 내연 관계였음을 증명하는 자료로 쓰였다는 것이다. 당시 모텔에서 문씨가 찍었던 그 사진이었다.
첫 재판에선 포스트잇만한 크기로 제출됐던 사진은, 공판기일이 진행됨에 따라 A4 용지 크기로 확대돼 새로 제출됐다.
문씨가 그 사진을 확대한 이유는 간단했다. 재판과 상관없이 이씨를 성적으로 모욕주기 위한 취지였다. 이씨는 이 사진의 존재를 재판에서야 알게 됐다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인 이씨는 사진을 지워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재판부의 반응은 싸늘했다. "유포 가능성이 없다"며 이씨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참다 못한 이씨는 불법영상촬영 등으로 문씨를 고소했지만 다시 한번 황당한 일을 겪게 됐다.
검사가 “이씨가 나체 사진을 찍는 데 동의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다“며 문씨의 카메라 등 이용 촬영 혐의를 기소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상식적으로 나체 사진을 찍었을 때 동의를 했는지 문씨를 수사해야지 동의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내라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게 이씨의 말이다.
몰래 카메라 촬영이 불기소 처분을 받은 이상, 사진을 유포하지 않고 가지고만 있는 것은 처벌할 수도 없고, 나체사진을 지우게 만들 어떤 방법도 없다는 것이다.
"제 나체 사진을 지워달라는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이게 말이 됩니까? 전 이제 그 사람이 언제 어떻게 내 사진을 누구와 공유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평생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수년간 피를 말리는 이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지난해 결국 이씨의 모든 사건에 대해 '원심의 판단'이 옳다는 결정을 내렸다.
둘이 내연관계라는 문씨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수천만원을 들여서 수년간 법적공방을 진행했던 것은 그 사람의 거짓말을 밝히고 내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졌네요."
진실이 밝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이씨는 이제 더이상 희망이라는 단어를 붙들고 있지 않다.
다만, 오늘도 자신의 나체 사진이 유포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며 매일 알약 4알을 털어넣으며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