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원의 천방지축] 선진국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 대륙과 미국을 강타하면서 전 세계의 기존 사회·경제 시스템을 뒤흔들고 있다. 중국 정부의 무차별 개인 정보 수집과 사용관행을 비판해 왔던 유럽 각국이 잇따라 공권력으로 위치 추적·강제 구금을 허용하는 극약처방을 내놓고 있다.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던 유럽에 ‘빅브라더’가 출현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 유럽, 전체주의 체제로의 회귀?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이날 영국 의회는 보리스 존슨 행정부가 상정한 비상법안인 ‘코로나바이러스 법’을 통과시켰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정부에 시민을 제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게 골자다. 이르면 이번 주중 정식 효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법안이 발효되면 정부는 공항과 항구를 폐쇄할 수 있고, 코로나19 전염 위험이 있는 시민을 구금·격리할 수 있다. 또 집회를 해산하고, 정부 조치에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벌금도 부과된다. 이러한 권한은 하원 승인을 받으면 6개월마다 갱신된다.
프랑스 의회도 코로나19 확산 저지를 위해 지난 22일 정부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보건 비상사태 선포 안건을 통과시켰다. 앞으로 프랑스 수사당국은 법원 영장 없이도 사회에 위협을 줄 수 있다고 의심되는 이에 대한 가택 수색, 가택 연금 등을 할 수 있고, 정부는 국내 치안 유지에 군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 비상사태는 선포 이후 두달간 지속되며 갱신할 수 있다. 23일(현지시간) AP통신에 따르면 영국, 독일, 이탈리아 보건담당 부처는 바이러스 양성 판정자의 동선을 정확히 추적하고 접촉 주민 신원 확인을 위해 실시간 스마트폰 데이터를 수집하기로 했다.
◇ 빅브라더냐? 자유의 여신이냐?
유발 하라리 예루살렘히브리대 교수는 20일(현지시간) 파이낸셜 타임스에 기고한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라는 제목의 글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전례없는 위기를 맞아 인류는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며 이번 사태는 ‘시민권’에 대한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인류가 직면한 첫 번째 선택은 전체주의적 감시체제의 강화와 시민권 수호 사이의 양자택일이다. 하라리 교수는 이미 중국과 이스라엘이 개인의 생체정보까지 활용해 밀착감시 체계를 가동한 상황을 거론하며 “중국 등 많은 나라들이 전염병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아래 시민 통제와 지역 봉쇄 등 정부의 감시체계를 강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빅브라더’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등장하는 전체주의적 감시체제를 가리킨다. 그런데 문제는 일단 빅브라더가 된 국가권력은 코로나19라는 위기상황을 극복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시민에 대한 통제와 생체 측정 방식의 감시 시스템을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미국 외교전문매체 포린폴리시도 지난 20일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극단 처방들이 ‘뉴 노멀(New Normal·새 시대의 표준)’로 자리 잡으면서 전체주의적 권력의 공고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코로나 팬데믹이 종식된 뒤에도 ‘코로나 빅브라더’가 하나의 표준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라리 교수는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공중보건’은 함께 향유할 수 있는 가치라며 한국을 비롯한 대만, 싱가포르는 정부의 투명한 정보 공개와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두 가치의 조화를 이룬 모범 사례라고 소개했다. 그는 또 “중앙집권적 시민 통제와 감시, 강한 처벌보다는 시민권 수호를 통한 국민들의 자발적 협조와 정부에 대한 믿음이 느리지만 팬데믹 극복에 더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빅브라더’는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유의 여신’이 승리한다고 본 것이다. 1886년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가 미국에 선물한 뉴욕 리버티섬의 자유의 여신상은 전 세계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이기도 하다. 오른손에 자유의 빛을 상징하는 횃불을 든 자유의 여신상 받침대 동판에는 엠마 라자루스의 시 ‘새로운 거상’이 새겨져 있다. “자유를 숨쉬기를 열망하는 지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인류 앞에 놓인 두 번째 갈림길은 ‘국수주의적 고립의 길’과 ‘전 세계적 연대의 길’이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은 코로나19는 덜 개방되고, 덜 번영하며, 덜 자유로운 세상으로 바꿔놓을 것이라는 비관론을 편다. 스테판 월트 하버드대 교수는 “코로나 팬데믹은 개별국가 단위의 권력을 강화하고 민족주의의 재발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 세계 모든 유형의 정부들이 코로나 위기를 통제하기 위해 비상조치를 채택할 것이며 각국 정부는 위기가 종식된 후에도 새로이 얻은 힘을 포기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월트 교수는 위험에 처한 시민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국 정부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면서 현재의 초연결, 초세계화 시대가 무너질 것이라는 전망도 내놨다.
리처드 하스 미국외교협회장은 코로나19로 국제 생산공급망의 취약성이 드러나면서 자급자족 경제, 보호무역주의 기조가 확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염병 피해를 복구하는 데 필요한 자원은 자국 내에서만 사용돼야 한다는 자국 우선주의 기조가 강화되면서 이민자 및 외국인 혐오가 확산되고 기후변화 등 전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국제 공조는 약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이번 사태의 여파로 반(反)세계화 조류가 강화될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하라리 교수는 “감염병 자체도, 그에 따른 경제적 여파도 모두 전 세계적 문제지만 두 가지 모두 전 세계적 협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며 "고립은 절대로 전염병을 극복하는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유일한 해결책은 정보를 최대한 빠르고 널리 공유하는 방법뿐"이라고 강조했다.
◇ 대재앙이냐? 진정한 지구촌시대의 시발점이냐?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교류와 활동범위를 지속적으로 넓혀왔으나 사실 민족과 국가 이상으로는 그 연대의 틀을 넓히지 못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위기상황에서는 연대의 범위를 파격적으로 넓혀야 한다. 인류는 공통의 적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We are the World)임을 온몸으로 실감한다. 최근 영국 찰스 황태자와 캐나다 트뤼도 총리 부인, 영화배우 톰 행크스가 확진자로 판명되었듯 바이러스는 인종, 국적, 문화, 종교, 직업, 재정 상황, 명성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코로나의 팬데믹이 인류의 대재앙이 될지 진정한 지구촌시대를 이끌어내는 촉진제가 될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오다가 놓친 자기성찰을 할 중대한 기회를 맞은 것인지도 모른다. 전염병의 고통이 인류에게 그런 마음의 길을 열어 자기 수정을 가능하게 한다면, 뜻밖에 성숙해진 세계를 우리에게 선물할 수도 있다. <건국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