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류영모의 만남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어느 날 이승만(李承晩·1875~1965) 대통령이 YMCA 연경반 금요강좌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류영모의 강의실로 들어왔다. 이승만이 이곳을 찾은 까닭은 그가 YMCA학관의 교사를 지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제자였던 현동완은 사제(師弟)의 인연으로 이승만과 일생 동안 가까이 지냈다. 이승만 대통령은 현동완의 능력을 인정하여 장관직(농림부, 보사부)을 두 번 추천한 적도 있었다.
류영모 또한 이날의 대통령 방문을 잊지는 않고 있었지만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YMCA 교사를 지낸 대통령이 기독교가 추구하는 영적인 각성을 바탕으로 어렵게 세운 국가를 위해 리더십을 발휘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반면 그가 서 있는 자리가 새로운 나라의 기풍을 만들 사람을 배출했다는 사실을 돌이켜 생각하면서, 류영모의 소명감 또한 더욱 확고해졌을 것이다.
류영모의 YMCA 강의를 현동완은 열심히 홍보했다. 교회를 통해 전파를 했고 신문 광고까지 냈다. 참석자가 갑자기 늘어나자 류영모가 현동완의 광고를 말렸다. 그는 말했다. "우리가 여기 모이는 것이 습관이어서는 안 됩니다. 금요일 오후 2시에 언제나 하는 습관이 되면 못 씁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좋다고 다다익선이라 하지만, 많이 모이면 허식이 생길 뿐입니다. 술주정과 난장판이 늘어날 뿐입니다."
하지만 현동완은 류영모의 강의를 많은 사람들이 듣도록 발벗고 뛰었다. 광주YMCA 강연을 만들었고 전쟁통에는 피란지 부산의 YMCA에서 강의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때로 강의실이 여의치 않을 때 현동완은 자신이 기거하던 좁은 방을 내줬다. 한 사람이라도 들을 사람을 더 받으려, 현동완의 부인은 문 밖에서 떨며 기다린 적도 있었다.
김교신은 '류영모 YMCA강연회'를 성서조선에 광고로 싣기도 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 성서회 광고
- 강사 류영모
- 장소 종로 중앙기독청년회
- 일시 : 매 일요일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한 사람의 강화(講話)가 아니요, 한 자리의 자유토론회라 할 것이다. 지극히 자유로운 비판도 있고 질의도 교환되어 정해진 형식도 없고 전통의 구속도 없는 것이 특색이다. 까닭에 전수한 신조를 그대로 간직하려는 경건한 신도는 이에 접근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진리를 탐구하려는 자에게는 한 번 통과하여야 할 세례가 될 것이다. 세상에 독창적인 식견을 말하는 바가 많으나 성서에 관해서 류영모 선생처럼 독창적인 식견을 지니신 이를 우리는 아직 한국에서 볼 수가 없었다. 순수한 한국사람으로서 노장지학을 궁구하며 불경을 인용하여 기독교의 성경을 담론하려는 이는 다른 데에서 얻기 어려운 기회이지 않을까 해서 추천한다. 또 이 모임에서는 에스페란토어에 의한 성서해설도 있을 터이다.
(1932년 10월호 성서조선 45호)
류영모는 자신의 YMCA 강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 강의는 죽을 때 소용되는 말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얘기를 하는 것은 제 생각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성령이 내 정신 보고 꼭 가라고 해서 나오게 된 것인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무슨 목적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서 여기 이렇게 모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저 밖에서 무슨 학교 공부를 하고 무슨 지위를 바라지만 그건 한낱 헛된 꿈일 뿐입니다. 순간순간의 생각으로 거듭 새롭게 되는 나를 봐야 합니다."
류영모의 가르침은 결코 쉬운 강의가 아니었다. 류영모의 말을 함석헌이 낫게 알아들었다고는 하나, 다 알아들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현동완은 그를 성자로 받들었으나, 현동완 역시 류영모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이런 점에 대해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제 말이 어렵다고 합니다. 쉽게 말할 줄을 모릅니다. 쉽게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 말은 세상에서 쓸데없는 말입니다. 돈이나 밥이나 건강이나 출세에 대해 말했다면 알아듣기가 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말은 말이랄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있던 말이라야 영원한 말입니다. 나의 말은 죽을 때나 죽고 난 뒤에 소용되는 말입니다. 내 말은 이 세상에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인생이 헛되고 우습다고 말을 합니다. 인생이 헛되고 우스우면 웃고 그만두면 될 터인데, 더 살려고 악을 쓰며 좋은 약을 찾고 병원에 입원을 하며 가족들을 괴롭힙니다. 우리가 나기 전부터 있던 말이 뭐냐 하면, 죽음에 임해서 죽지 않겠다고 떼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말은 고요히 죽는데 소용되는 말입니다. 말이 무슨 쓸 데가 있습니까. 듣는 이가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류영모는 말이 적은 사람이었다. 잠잠히 신을 향한 묵식(默識)을 행했던 사람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말을 했다. "내 삶의 순간마다 나는 침묵이 더없는 웅변임을 알게 된다. 말을 해야 한다면 될수록 적게 하라. 한 마디로 충분하면 두 마디를 하지 말라. 나는 매일 침묵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침묵을 통해서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다."(간디, '날마다의 명상' 중에서)
류영모는 과묵했지만 일단 강의에 들어가면 시냇물이 흐르듯 말이 끊기지 않았다. YMCA 강의는 오후 2시에 시작되어 3시간을 넘겼다. 세계대학봉사회관에서 한 강의는 6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구기동 집에서 한 노자 강의와 중용 강의는 오전 7시부터 낮 12시까지 이어졌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죽어서 섭섭할 것은 없겠으나 말 못하게 되는 건 섭섭합니다." 강의장이 여의치 않으면, 류영모는 가정집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우리가 이렇게 모일 수 있는 틈은 무슨 은혜입니까? 이 틈에 우리가 모였으니 이것은 무슨 은혜입니까?"
류영모의 강의를 들은 사람 중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김흥호일지 모른다. 그 어렵다는 강의를 들은 그는 '생명'을 받았다. 김흥호(金興 浩·1919~2009)는 황해도 서흥 출신으로 부친이 기독교 목사였다. 평양고보와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했으며,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와 교목실장, 감리교신학대 종교철학과 교수를 지낸 분이다.
이 화려한 이력의 김흥호는 1948년 봄 류영모의 성경 강의에 참석한다. 강단에 선 류영모는 문득 김흥호에게 이렇게 물었다. "하나, 둘, 셋이 무엇입니까?" 그는 문득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서 무서운 힘을 느꼈다. 말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이 무게는 어디서 오는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류영모의 말들은 투철한 실천을 매달고 있는 말이었다. '하나, 둘, 셋'의 질문은 이후 김흥호의 동양적 기독교를 설명하는 삼재(三才) 사상을 이룬다.
김흥호는 류영모를 따라다닌 지 3년 만인 1951년 북한산 구기동 계곡 폭포가 있는 곳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요한복음 구절에 대한 류영모의 설명을 듣고 문득 귀가 뚫리는 성문(聲聞)을 체험한다. 6년째 되던 1954년 김흥호는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류영모는 그의 병이 마음의 번뇌에서 비롯된 것임을 꿰뚫는다. 그는 이후 병상에서 일어나 45년간 병치레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54년 3월 17일 김흥호는 주역을 읽고 있었다. 매일 한 괘씩 종이에 그려놓고 들여다보다가 아침 나절에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김흥호는 이때의 경험을 '시간제단(時間際斷, 시간이 끊어지는 체험)'이라고 설명했다. 이날부터 그는 스승의 일일일식(一日一食)을 본받아 실천한다.
21세기엔 기독교와 불교가 서로 보완 역활
석달 뒤에 김흥호는 '대학'을 우리말로 옮겨, 류영모를 찾아가 보여준다. 얼마 후 다시 '중용'을 해석해 보였다. 류영모는 훈민정음을 연구한 이정호(전 대전대 총장)와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김흥호의 '대학 번역서'를 내놓으며 "공자가 오셔서 번역해도 이 이상은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김흥호를 향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쓰기는 김군이 썼지만, 이건 하느님의 소리요." 김흥호의 호 '현재(鉉齋, '깨달음의 귀' 즉 계시의 의미)'는 그때 류영모가 지어준 것이다.
김흥호는 이렇게 말했다. "다석사상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은 혼합종교 아니냐고도 하고 다원주의 아니냐고도 합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요. 일원다교(一元多敎, 하나의 하느님의 다양한 가르침)라고 할까요. 겉으로는 무슨 종교를 표방해도 결국 근원은 하나임을 밝히는 것이 선생님의 사상입니다. 아마도 21세기에는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의 좋은 점과 불교의 좋은 점을 제대로 가려내서 저렇게 매치를 시켜놓은 분이 선생님입니다."
21세기의 정신가치 지형이 어떻게 그려져야 하는지, 앞서 방향을 제시한 사람이 류영모라는 얘기다.
류영모는 참으로 고요하다. 가장 소란하고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도 어떻게 저토록 고요한 길을 걸어갔는가. 그는 이름을 취(取)하지 않았다. 그가 오로지 바라본 것은 자기 속에 살고 있는 하느님, 이름도 없는 본바탕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나 불교가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통용될 수 있는 까닭은 시종일관 그 이름도 없는 본바탕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성령이며 '얼나'다. 그가 35년간 YMCA에서 가르친 것은 스스로가 길을 얻은 '얼나'에 대한 굳세고 한결같은 동어반복이었다. 생각을 거기에 두라, 신이 거기에 있다. 염재신재(念在神在).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다석어록 = 얼나는 이름이 없다
사람 중에는 이름을 자기로 아는 이도 있다. 명예에 취하여 체면을 지키다가 거짓말을 하고 속 빈 겨껍질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름이란 남이 부르기 위하여 붙여놓은 것이며, 내 이름 류영모도 이름에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이란 마치 감옥에서 죄수에게 붙여주는 죄수번호와 같은 것이다.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가 감옥 속에 갇힌 죄수라는 것뿐이다. 이름이란 수치스러운 것이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름 없는 얼나가 내 본바탕이다. 나는 영원한 생명이 폭발하여 나타나는 참나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얼나를 찾아 자각한 인생은 이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진리인 얼나에 무슨 이름이 붙을 리가 없다. 얼나는 하느님의 생명인 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나면 이름 석 자를 외우느라고 애쓰지만 영원한 입장에서 보면 어리석은 일이다. 살아서 죄수번호인 이름에 잡혀서 사는 이도 가엾지만 죽어서까지 이 이름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돌에 새겨두는 것은 한심하다. 영원한 것은 얼나뿐이다. 얼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내 속에 얼나가 와 있다. 내 마음속에 온 하느님 아버지의 형상이 얼나이다. 내 마음속에 온 하느님(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