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베이징에서 배달 전문 앱으로 음식이나 일용품 등을 주문하면 배송 시간이 전보다 눈에 띄게 빨라진 것을 체감할 수 있다.
이유가 있었다. 중국 최대의 외식 배달 업체인 메이퇀은 지난달에만 7만5000명의 배달원을 추가 고용했다. 어러머나 허마셴셩 등 다른 배달 업체도 마찬가지다.
베이징 거리에는 주문을 기다리는 배달원들의 오토바이가 장사진을 이룬다. 춘제(春節·중국 설) 연휴 때부터 코로나19 확산이 극에 달했던 지난달 중순까지는 좀처럼 목격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메이퇀에 새로 합류한 배달원의 대부분은 공장 근로자나 서비스업 종사자, 농민 등이다.
배달원이 된 이유를 묻자 37% 정도가 일하던 공장·식당·상점이 여전히 휴업 중이라고 밝혔고, 25%는 기존 근무지가 아예 폐업했다고 답했다. 수입원이 끊겨 어쩔 수 없이 배달원이 됐다는 얘기다.
한국 인구보다도 많은 5200만명의 농민공(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일하는 빈곤층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거나 봉쇄 지역에 갇힌 채 별다른 수입 없이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다.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갓 태어난 아기를 유기하거나 자살을 선택하는 비극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코로나19와 벌인 '인민전쟁'의 끝이 보인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최대 피해자인 빈곤 계층의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다.
올해 전면적 샤오캉(小康·모두가 먹고살 만한) 사회 달성을 공언한 중국 공산당과 권력층의 자신감이 공허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習 격려에도 中企·농가 이미 쑥대밭
지난 10일 시 주석이 후베이성 우한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해 12월 초 우한을 중심으로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시작한 지 3개월여 만이다.
많은 이들이 시 주석의 우한 방문을 코로나19 사태의 종식 선언이 임박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
시 주석은 "각고의 노력 끝에 후베이성의 상황이 호전되고 중요한 성과도 거뒀지만 전염병 방역·통제 임무는 여전히 막중하다"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라고 독려했다.
다만 그는 "용감하게 투쟁하고 승리하는 게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품격이자 강점"이라며, 신중국 성립 이후 최대 위기였던 코로나19와의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음을 시사했다.
중국 관영 언론들도 맞장구를 친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11일자 1면에 시 주석의 우한 방문 사진을 크게 게재하고 "결전의 땅에 인민과 함께 섰다"고 전했다.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논평에서 "시 주석의 우한 방문은 코로나19 전쟁의 전환점을 의미한다"며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중국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시 주석은 "민생이 안정돼야 인심과 사회도 안정된다"며 "기업·농가 지원과 고용 안정, 취업 확대 업무에 힘쓰고 빈곤 퇴치 임무도 결연히 수행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누적 확진자 8만명, 사망자 3000명 이상의 인명 피해를 낸 코로나19 사태는 민초들의 삶까지 단기간 내에 회복이 불가할 정도로 황폐하게 만들었다.
최근 베이징대와 칭화대가 공동으로 중국 각지의 995개 중소기업의 현금 보유량을 조사한 결과 34%가 한달치밖에 안 남았다고 응답했다.
1~3개월이면 바닥이 난다고 응답한 기업이 85%에 달한 반면, 6개월 이상 버틸 수 있다는 기업은 10% 수준이었다. 올해 매출이 50% 이상 감소할 것으로 예상한 기업은 29.6%, 경영난 때문에 감원을 시작했거나 계획 중인 기업은 22%로 집계됐다.
광둥성 광저우에서 식기 도매업을 하던 리차오(李超)씨는 국제금융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한 달간 매출이 75% 급감해 함께 일하던 직원 3명을 모두 해고했다"며 "나도 현재 의류 공장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중"이라고 토로했다.
농가의 상황도 심각하다. 웨이보 등 중국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한 양봉업자가 자살한 사연이 큰 관심을 끌었다.
44세의 양봉업자 류더청(劉德成)씨는 지역 간 이동 통제로 도로가 막히고 일손을 도울 농민공도 구할 수 없어 600통 넘는 벌통을 폐기해야 할 상황에 이르자 손실을 감당 못 하고 자살을 선택했다.
또 다른 양봉업자는 꽃이 핀 장소까지 벌통을 옮길 수 없어 하루에 수백㎏씩 설탕을 소모하다가 결국 파산했다.
양계업자들은 판로가 끊기자 기르던 닭을 산 채로 묻거나 개에게 먹이로 주고, 채소를 키우던 농가는 밭에서 농산물이 썩어 가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하이난성의 한 농장주는 현지 언론을 통해 "농민공들이 돌아오지 않아 하미과(哈密瓜·멜론의 일종)가 다 익었는데 수확을 못 했다"며 "그대로 버리거나 돼지 먹이로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농민공 자녀, 빈곤 때문에 자살까지
중국 인력자원사회보장부는 지난 6일 기준 아직 일터에 복귀하지 못한 농민공이 52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발표했다.
일하던 공장이나 식당, 상점이 문을 닫았거나 후베이성 등 위험 지역에 갔다가 발이 묶였기 때문이다.
남방도시보 등에 따르면 2018년 농민공의 월평균 소득은 3721위안이었다. 5200만명의 농민공이 일을 쉰 한달 반 동안 약 3000억 위안(약 51조5000억원)의 임금이 지급되지 않은 셈이다.
국가 전체로도 큰 금액이지만 농민공 개개인이 입장에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의 경제적 타격이다.
지난달부터 지방정부에서 전세 차량에 농민공을 태워 일자리가 있는 대도시로 실어나르는 조치가 시행됐지만, 지난 7일 기준 이송된 농민공은 170만명에 불과하다.
수개월째 제대로 된 벌이를 하지 못하다 보니 도시로 나간 농민공의 송금에 의존해 온 고향 가족들의 생활도 피폐해졌다.
관영 환구시보는 지난달 29일 허난성 덩저우의 한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고 보도했다.
그 이유가 기가 막히다. 이 빈곤 가정에 3명의 자녀가 있는데 스마트폰이 한 대뿐이라 개학이 연기되면서 시작된 온라인 수업 진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것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지난 10일 "교육 당국이 온라인 수업을 지시했지만 수많은 빈곤층 학생들은 사이버 공간을 이용할 능력이 없다"며 산시성 농촌 마을의 한 학교를 예로 들며 "전체 학생 328명 중 절반이 온라인 수업을 듣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웨이보의 한 누리꾼은 "우리 마을의 몇몇 학생은 주민위원회 사무실 앞으로 책상을 옮겨와 무선 인터넷에 몰래 접속한 뒤 온라인 수업을 듣고 있다"며 "마음이 아프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지난달 22일 광둥성 산터우에서는 한 농민공 부부가 갓난아이를 유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이 신속히 발견해 아이의 생명은 무사했다.
이들 부부는 "코로나19 때문에 일을 구하지 못하고 갖고 있던 돈도 모두 써버려 아이를 양육하기 어려웠다"며 "아이가 우리와 함께 굶어 죽게 할 수는 없었다"고 울었다.
◆코로나19에 공허해진 샤오캉·탈빈곤 구호
중국 당국도 이 같은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니다. 국무원에서 농민공 지원책을 잇따라 내놓고 있지만 실효성에 의구심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다.
대부분 농민공 고용을 유지하거나 늘리는 중소·영세기업에 세제 혜택이나 보조금을 지급하는 수준이다.
이 때문에 2003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이 유행했을 때의 경험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광둥성에서 격주로 발행되는 인기 잡지 '신주간'은 "사스 사태 당시 중국 재정부 등은 20억 위안을 긴급 편성해 농민공들에게 직접 지급했고 사스 외 질병도 무료로 치료해줬다"며 "사스가 유행하는 기간에는 농민공을 해고하는 행위를 아예 금지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두 자릿수로 줄어든 중국은 전염병과의 전쟁에서 승전 선언을 할 날이 머지않았다며 샴페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우한을 방문한 시 주석은 "코로나19 사태는 경제·사회 발전에 진통을 야기했지만 중국 경제가 안정 속에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추세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 정부와 관영 언론은 올해 전면적 샤오캉 사회 달성과 완전한 탈빈곤 약속을 반드시 실현하겠다고 공언한다.
하지만 가뜩이나 심각한 빈부 격차에 코로나19 사태까지 덮치는 바람에 농민공 등 빈곤 계층에 드리운 어둠이 더 짙고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