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명의 수도에는 서양 선교사 한명이 1년 전에 도착해 있었다. 이탈리아 태생인 마테오 리치다. 그는 처음으로 중국 수도에 들어온 예수회 신부였고, 베이징 지식인 사회를 흔들어 놓았다. 마테오 리치가 내놓은 세계 지도 ‘곤여만국전도’를 보고 중국인은 놀랐다. “이 지도를 통해 중국인은 땅은 구(球)이고, 세계는 유럽·리미아(아프리카)·아시아·남북 아메리카·메가라니카(남방대륙)의 오대륙으로 이뤄져 있음을 처음 알았다.”(전상운 지음 ’한국과학사‘)
‘곤여만국전도’는 마테오 리치가 베이징에 와서 만든 중국인을 위한 세계지도였다. ‘곤여만국전도’의 중심에 유럽대륙을 그려놓지 않았다. 중국을 지도 한복판에 넣었다. 중국인이 새로운 지도를 접하고 받을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다. 예수회 신부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이광정은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를 베이징에서 입수했다. 그는 서둘러 조선으로 돌아갔다. 조선 지식층이 받은 충격은 깊었다. ‘곤여만국전도’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지봉유설‘(1614년)의 저자로 흔히 기억되는 이수광의 글에서도 감지된다. 이수광은 6폭짜리 ’곤여만국전도‘를 ’구라파국여지도‘라고 불렀다. 구라파는 유럽을 가리키는 중국어다. 이수광은 마테오 리치 지도에서 ’구라파‘에 주목했던 것이다.
“진주사(陳奏使) 정두원이 명나라 서울에서 돌아와 천리경(千里鏡)·서포(西砲)·자명종(自鳴鐘)·염초화(焰硝花)·자목화(紫木花) 등 물품을 바쳤다. 천리경은 천문을 관측하고 백리 밖의 적군을 탐지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서포는 화승(火繩)을 쓰지 않고 돌로 때리면 불이 저절로 일어나는데, 서양 사람 육약한(陸若漢)이란 자가 중국에 와서 두원에게 기증한 것이다···. 임금이 하교했다. 서양 대포를 찾아온 것은 적의 방어에 뜻을 둔 것이니 가상하기 그지없다. 특별히 한 자급(資級)을 올려주라.”
당시 서유럽은 나중에 과학혁명이라고 불리는 변혁을 겪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시작했고(1543년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 출간) 갈릴레이, 케플러를 거쳐 뉴턴(1687년 ‘프린키피아’ 출판)으로 완성되는 위대한 지식 혁명의 시기였다. 조선이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를 깨달았을 때, 유럽인은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를 알아가고 있었다.
중국은 서양과학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천문을 관측하는 기관 책임자를 예수회 신부로 갈아치웠다. 청의 강희제(1654~1722)는 예수회 신부를 불러들여 유클리드 책 ‘기하 원본’을 공부했다.조선 지식인 사회의 반응도 뜨거웠다. ‘북학’ ‘실학’ ‘서학’의 유행이 시대별로 나타난 데서 그건 확인된다. 베이징에 가면 과학자이자 수학자인 예수회 신부들을 만나려는 조선 지식인이 줄을 이었다. 가령, 1766년 홍대용은 베이징에 갔을 때 천주교당 4곳 중 남(南)당으로 독일인 선교사들을 찾아간다. 자꾸 찾아와 귀찮게 하는 조선인을 선교사가 피하자, 홍대용은 간곡한 편지를 남겼다. 홍대용은 겨우 독일 선교사를 만났고, 조선에 돌아와서 그는 개인 천문대를 고향 천안에 세웠다.
하지만 조선 사회 일부의 열기는 ‘찻잔 속 폭풍’으로 그쳤다. 조선 지식인 대부분은 ‘땅은 사각형이고 평평하다’는 사고를 대신해 등장한 지구 구체설과 지전(地轉)설을 듣고도 무덤덤했다. 우주가 뒤집히는 충격을 받지 않았다. 권력 집단은 코앞에 닥쳐온 위기 신호를 읽지 못했다. 증기선 군함과 함포의 모습으로 찾아올 서양 과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이런 일이 있었다. 조선 왕 영조는 해를 관측하는 특수망원경과 천문학 책을 무단 폐기처분하기도 했다. 베이징에 다녀온 관료들이 구해온 귀한 장비이고 자료였다. 관련 부서는 베이징에서 갖고 온 책과 장비가 자신들에게 전달되지 않는 걸 의아하게 생각했고, 어느 날 왕에게 이 같은 뜻이 전달되었다. 이에 대해 영조는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는 건 불경한 일”이라는 식으로 힐난했다. 해는 군주를 상징하니, 일식관측용 망원경은 군주를 엿보는 장비가 아니냐는 식의 질책이었다. 천문 관련 책의 행방에 대해서는 “이미 세초(洗草)해 버렸다”라고 말했다. 책의 먹물을 물로 씻어 본문을 못 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과학을 이해하지 못한 한국인이 최종적으로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는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소설가 이광수가 쓴 작품 ‘무정’을 보면 조선인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불행의 이유를 뒤늦게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광수는 작품에서 과학과 지식이 한국인에게 필요하다고 절규하고 있다(과학사학자 정인경의 책 ‘뉴턴의 무정한 세계’에 관련 내용).
“저들에게 힘을 주어야 하겠다. 지식을 주어야 하겠다. 그리하여 생활의 근거를 안전하게 하여줘야 하겠다. 과학! 과학! 하고 형식은 여관에 돌아와 앉아서 혼자 부르짖었다. 세 처녀는 형식을 본다. '조선 사람에게 무엇보다 먼저 과학을 주어야 하겠어요. 지식을 주어야 하겠어요.‘“
그런데 고개를 드는 의문이 있다. 이광수가 살았던 20세기 초도 그렇고 21세기 초인 지금도 그렇고, 한국인은 과학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것인가? 왜 서양에서 과학혁명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한 나라의 지식인 사회가 과학에 푹 젖어본 경험이 없는 한국인은 그걸 모른다. 그런 면에서 한국인은 1603년의 조선인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과학이 무엇인지, 과학적 사고가 무엇인지, 수학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가령, 과학은 지식이라고 많은 이가 잘못 생각한다.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얻는 방법이다. 방법에 방점이 찍혀 있다. 문과형 지식인으로 살아온 나 역시 오래도록 잘못 알아왔다. 또 수학은 계산해서 답을 얻어내는 과정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알고 보니, 수학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증명하는 학문이었다. 예수회 신부가 청 황제 강희에게 가르친 유클리드의 ‘기하 원본’은 23개의 정의와 5개의 공리를 갖고 465개의 명제가 옳음을 증명하는 법을 담고 있었다. 즉, 지식을 확충해 가는 방법, 과학하는 엄밀한 방법을 그 책은 담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한국 사회에서 ‘사이비 종교’ 문제가 재부상하고 있다. ‘사이비 종교‘가 한국인에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지를 이번 사건은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 사회는 왜 이렇게 이상한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그건 과학적 사고가 부족하고, 과학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데 뿌리가 있다. “과학책까지 봐야 해?”라는 말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먹물들이 툭 내뱉는 게 한국 사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