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오디세이] 바이런은 왜, 지중해 해협을 미친듯 헤엄쳤나

2020-02-06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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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지중해 오디세이' 10

 

[다르다넬스 해협]

<지중해 오디세이 10> 그리스와 영국 시인 바이런


“에로틱한 연애사건을 많이 저지른 젊은이”가
그리스를 사랑하다 ‘그리스의 영웅’으로 추앙
‘갑’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을’이었던 낭만파

‘헤로(Hero)’는 사랑과 성(性)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비너스)를 모시는 아름다운 여사제였습니다. 잘생긴 젊은이 ‘레안드로스(Leandros)’는 헤로에게 반해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사랑을 주저하는 헤로를 유혹합니다. “당신이 모시는 아프로디테 여신은 사랑의 여신입니다. 당신이 여태 사랑을 해본 적 없는 처녀인 걸 알면 그분이 비웃지 않을까요?” 레안드로스의 목소리와 ‘논리’에 헤로는 맥없이 설복당합니다.

문제는 둘 사이를 ‘헬레스폰투스 해협’이 가로막고 있었다는 것. 헤로는 해협 서쪽(유럽 쪽) ‘세스토스’ 언덕 위 아프로디테 탑에서 살고, 레안드로스는 해협 동쪽(터키 쪽)인 ‘아비도스’에 삽니다. 오늘날 ‘다르다넬스 해협’이라고 불리는 헬레스폰투스 해협은 지중해와 터키의 내해라고 할 수 있는 마르마라 해를 연결합니다. 배를 타고 지중해 동쪽 에게 해에서 터키 이스탄불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길이는 61㎞, 넓은 곳은 폭이 6㎞이나 좁은 곳은 1.2㎞ 정도입니다. 폭이 좁은 곳은 그만큼 물살이 급하겠지요.

사랑을 허락받은 레안드로스는 매일 밤 헤엄쳐 헤로에게 갑니다. 새벽이면 다시 건너오고요. 헤로는 레안드로스가 캄캄한 밤, 바다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지 말라고 탑에 등불을 켜둡니다. 여름 내내 계속된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밀회는 날이 차지고 겨울이 오면서 비극으로 끝납니다. 폭풍이 닥친 겨울밤, 레안드로스는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거센 파도에 휩쓸립니다. 바람은 저 멀리 아프로디테의 탑 꼭대기에 헤로가 켜놓은 등불도 꺼트립니다. 캄캄한 바다 가운데서 길을 잃은 레안드로스는 등불마저 꺼지자 힘이 빠집니다. 그날따라 등불이 꺼진 걸 몰랐던 헤로는 다음날 아침, 해변에 떠밀려온 연인의 시체를 봅니다. 절망에 빠져 탑에서 뛰어내려 연인의 뒤를 따라갑니다.

1810년 5월 3일, 22세의 영국 청년이 친구와 함께 세스토스에서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뛰어듭니다. 그는 차가운 해협의 거센 물살을 헤치고 나갑니다. 저 멀리 러시아 남서부 캅카스 산맥 꼭대기의 눈 녹은 물은 흑해를 지나 보스포루스 해협의 이스탄불 앞바다를 거쳐 마르마라 해까지 참으로 멀리 흘러왔으나 아직은 차갑습니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 지중해로 들어간 후 따뜻한 햇볕을 받아야만 오늘날 여행자들이 쾌적하게 느끼는 온도로 올라가는 겁니다.

해협으로 뛰어든 청년은 약 한 시간 뒤에 직선거리로 1.2㎞ 떨어진 아비도스 해변에 올라섭니다. 그는 나중에 “거리는 짧았지만 물살을 감안하면 4마일(6.4㎞)은 될 것이다. 3주 전에 시도했을 때 물이 차가워서 한달을 연기했는데, 여전히 차가웠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이 청년은 물에서 나와 “세스토스에서 아비도스까지 헤엄친 후(Written After Swimming From Sestos To Abydos)”라는 시를 썼습니다. 이 시는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Childe Harold's Pilgrimage)>라는 제목의 시집에 지중해, 특히 그리스의 여러 장소와 인물, 신화의 주인공을 소재로 한 여러 편의 시와 함께 실렸습니다. 이 시집은 즉시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유럽에서 인기를 끌어 ‘슈퍼 베스트셀러’, ‘초대박’을 터뜨렸습니다. 시인은 이 성공에 자기도 놀라서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유명해졌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맞습니다. 그날 다르다넬스 해협의 차고 거센 물살을 가른 청년은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고든 바이런(1788~1824)입니다. 배를 타고 지중해를 여행하던 바이런은 이 해협에 이르자 사랑을 찾아 매일 밤 물살 빠른 이 바다를 헤엄쳐 건넜던 레안드로스 흉내를 내본 겁니다. 영국에서 이미 “에로틱한 연애사건도 많이 저지른 청년”으로 이름났던 젊은이가 저지를 만한 행동이었습니다.

바이런은 이처럼 어떤 이들은 멋있고 아름답게 보지만, 어떤 이들은 무모하고 소영웅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일들을 일평생 저지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중들은 그의 ‘낭만적 행동’에 열광했으나 그와 동시대 영국 시인들로 역시 낭만파로 분류되는 워즈워스나 콜리지는 그를 “괴물”, 혹은 “악마적”이라며 외면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희곡에, 헨델이 음악에, 루벤스가 화폭에 아름답고 슬프게 묘사한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사랑을 바이런이 희화화한 것이 원인일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어두운 12월에,/레안드로스가 밤마다/(어떤 처녀가 이 이야기를 모르랴?)/그대의 시냇물인 널따란 헬레스폰투스를 건넜다면!”이라고 시작한 바이런은 “그는 ‘사랑’을 위해 헤엄쳤으나, 나는 ‘영광’을 위해 헤엄쳤으니.”라는 구절로 레안드로스와 자신을 비교하고, 마지막에는 “그대는 목숨을 버렸으나, 나는 감기에 걸렸구나”라는 내용으로 끝냈습니다. <바이런 시선집(윤명옥 역, 지식을 만드는 지식)>. 바이런을 비판한 워즈워스나 콜리지는 어쩌면 “다른 예술가들은 거기에 가보지 않고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는데, 현지를 찾아가 엄청난 모험을 하고도 가볍기 짝이 없는 시를 쓰다니!”라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바이런은 무척 미남이었다고 합니다. 열살 때 세상을 떠난 백부의 뒤를 이어 ‘6대 바이런 경’이 되었습니다. 잘생겼지, 귀족이지, 유산도 좀 받았지, 과격하고 충동적이면서도 문학적이지…, 그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른쪽 다리를 절었습니다. 백부의 유산은 일찍 바닥났습니다. 케임브리지에 들어갔으나 귀족 집안 자제들은 그를 자기들의 세계에 넣어주지 않았습니다. 도박을 좋아했던 그는 남은 유산도 도박으로, 환락가 여성들과 어울리는 것으로 탕진했습니다. 다리가 불구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수영과 권투, 사격 같은 스포츠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습니다. 이때 기른 수영 실력이 훗날 다르다넬스에서 레안드로스 흉내를 내는 원천이 된 겁니다.

당시 영국 귀족 사회의 관행을 따라 그는 ‘그랜드투어’라고 불린 유럽대륙 여행에 나섰습니다. ‘그랜드투어’는 영국 상류층 청년들이라면 꼭 경험해야 하는 교육과정이었습니다. 바이런은 2년 동안 프랑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몰타, 알바니아, 그리스를 돌아봤습니다. 이때 그는 그리스와의 사랑에 빠집니다. 귀국해서 출간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1, 2부는 그 사랑을 듬뿍 담은 시집입니다. 바이런의 시집은 영국 사람들에게 그리스에 대한 동경을 심어줍니다. 후일 산업혁명으로 경제적 여유가 생겨 해외여행에 나서기 시작한 영국 대중은 바이런의 시를 안내서 삼아 발길을 그리스로 돌립니다. 오늘날 그리스가 관광대국으로 성장하고 국내 총생산의 25%를 관광수입에 의존하게 된 건 바이런의 이 시집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갑자기 유명해지고 돈도 벌게 된 ‘미남 귀족’ 바이런은 영국 사교계의 총아가 됩니다. 여자들이 예전보다 더 많이 모이고 스캔들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사랑과 배신이 연속됩니다. 평판이 다시 나빠집니다. 여기서 벗어나려고 한 여성과 결혼해 딸을 낳습니다. 에이다라는 이름의 딸이 태어나자 그는 “나처럼 시인이 되지는 말아라. 정신 나간 사람은 한 집에 하나면 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의 바람이 전해졌는지 에이다는 수학자가 되었고, 그의 업적에서 오늘날의 컴퓨터가 나오게 됐다고 해서 관련 학자들은 에이다를 컴퓨터 개발의 원조로 꼽습니다.

여러 여자를 사귀던 그는 사촌 누이와도 사랑에 빠집니다. 그 무렵 ‘에로틱’한 시집도 한권 냈습니다. 불미스러운 일들이 소문나면서 상류사회에서 배척됩니다. 환락가와 도박장을 다시 드나듭니다. 그때 만난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보고 이해하게 됩니다. 당시 영국 귀족은 당연직 의원이었습니다. 의회에 들어간 그는 약자들의 삶을 대변하기도 했습니다. 귀족들의 미움도 더 많이 받게 됐습니다. 상류사회의 비난이 더 극성스러워지자 그는 “나에 대한 비난이 옳다면 내가 영국에 어울리지 않는 자이고, 틀리다면 영국이 나에게 맞지 않는 나라”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해외로 떠납니다. 이후 그는 영국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영국 시인 퍼시 샐리 남매와 함께 지내다가 그들의 사촌 여동생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흠모하던 이탈리아 귀족 부인을 위한 시도 쓰며 지냅니다.

그는 어느 날 이탈리아를 떠나 남아메리카로 떠날 생각을 합니다. 남아메리카 독립의 영웅이었던 시몬 볼리바르가 죽었다는 소식에 남미로 가서 추모하려던 바이런은 그리스가 독립전쟁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리스로 발길을 돌립니다. 맨몸으로 떠난 게 아니라 함선을 한척 사들여 그리스 독립 지원군을 태웠습니다. 자신은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의 군복에 스코틀랜드 군복 디자인을 섞은 묘한 군복을 입은 채였습니다. 또 자기 때문에 그리스를 사랑하게 된 영국인들에게 그리스 독립 자금 모금을 요청, 큰돈을 모아 그리스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은 그에게 사단을 하나 맡기며 그의 참전을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싸워보지 못하고 병사합니다. 1824년 4월 19일입니다.

그리스 정부는 2008년부터 매년 4월 19일을 ‘바이런의 날’로 정해 그를 추모하고 그의 그리스 사랑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7월 하순에는 여러 가지 이벤트로 꾸며진 ‘바이런 축제’도 열고 있습니다. 이런 행사들이 그리스로 관광객을 또 불러 모읍니다. 바이런은 죽어서도 ‘그리스의 영웅’입니다.

영국 상류층 자제들의 유럽여행의 모든 것을 다룬 책 <그랜드투어>(웅진지식하우스)를 쓴 설혜심 교수(연세대)는 이 책에서 바이런을 유명하게 해준 사람은 따로 있다고 합니다.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초판을 출판해준 영국 출판업자 존 머레이 2세라는 사람인데, 그는 자신이 기획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그리스 관광안내서에 바이런 시집을 끼워 팔았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관광에 인문을 믹스한 출판기획이라는 거지요. 이 전략이 성공하는 바람에 바이런의 시집이 많이 팔렸고, 그리스 여행도 붐을 맞게 됐다는 겁니다.

하지만 바이런은 그것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그가 머레이에게 보낸 편지에는 출판업자로서의 머레이의 불성실한 태도를 꾸짖는 내용도 있습니다. 왜 출판을 서두르지 않느냐, 돈은 왜 빨리 안 주느냐, 더 줄 생각은 왜 안 하냐는 따위 말입니다. 하지만 바이런은 머레이가 ‘갑’인 줄 몰랐습니다. 문학 비평가이기도 했던 머레이는 이미 영국 문화계의 권력으로 바이런의 시집은 낼 수도 안 낼 수도 있는 지위였고, 바이런은 그저 펜대나 휘두르는 낭만적 먹물, 남이 자신을 만들어 준 것도 모르고 저만 잘난 척하는 가냘픈 시인으로 생각했다는 거지요. 바이런은 죽기 전에 돈이 좀 될 거라는 생각으로 자서전을 써뒀는데 나중에 이것을 읽은 머레이는 원고를 불태워버렸습니다. 영국 귀족사회의 난잡한 모습이 여과 없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됩니다. 마지막 원고가 불태워진 바이런. 그가 을이 맞는 것 같군요.




 

[바이런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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