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배(解配)와 함께 남양주로 돌아온 정약용은 1830년 강진의 제자 이대아(李大雅)에게 편지를 보냈다.
“지난번 보내준 차와 편지는 가까스로 도착하였다. 이제야 감사를 드리네. 올들어 병으로 체증이 더욱 심해져 잔약한 몸뚱이를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떡차(茶餠)에 힘입어서라네. 이제 곡우(穀雨)가 되었으니 차를 다시 보내주었으면 좋겠네. 다만 지난번에 보내준 떡차는 가루가 거칠어 그리 좋지가 않았네. 모름지기 세번 찌고 세번 말려 아주 곱게 빻아야 한다네. 또한 반드시 돌샘물로 고루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지은 떡으로 만들어야 찰져서 먹을 수가 있다네. 잘 알겠는가?”
편지를 읽어보면 정약용의 요구사항이 꽤 많다. 차를 보내주었으면 감사하게 받아 마시면 될텐데, 정약용은 이것저것 잔소리를 죽 늘어놓았다. 그런데 차를 잘 알고 차를 좋아하지 않으면 이런 잔소리도 할 수 없을 터다.
정약용은 남양주 시절에도 차를 좋아했지만 유배지에서 더욱 열심히 차를 마셨다. 유배지에서 울화를 가라앉히는 데도 차가 효과적이었다. 방에서 하루 종일 공부하고 가르치고 집필하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차로 다스렸다. 그러니 정약용에게 차는 약용(藥用)의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초의선사·추사로 이어진 茶 사랑···조선 후기 차 문화 일궈
정약용은 1805년경 강진 다산초당 인근 백련사(白蓮寺)를 오가다 차밭을 발견하고, 백련사 차를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혜장(惠藏) 스님과 교유하게 된 것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나듯 다산은 잎차가 아니라 떡차를 즐겨 마셨다. 떡차는 찻잎을 쪄서 말리기를 반복한 뒤 이를 빻고 물로 반죽해 덩이를 지어 떡처럼 만든 것을 말한다. 강진에서 정약용이 만든 이 떡차를 두고 만불차(萬佛茶)라 부르기도 했다.
19세기 문인관료 이유원(李裕元)이 지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강진 보림사의 죽전차(竹田茶)는 열수 정약용이 얻어냈다. 그 품질이 보이차에 밑돌지 않는다. 곡우 전에 딴 것을 더욱 귀하게 치니 이를 우전차(雨前茶)라 불러도 좋다.” 보림사의 죽전차도 정약용이 만들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보림사는 강진 백련사를 일컫는다. 정약용은 1808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뒤엔 아예 직접 떡차를 만들었다.
조선 후기 차 문화는 정약용과 초의선사(草衣禪師),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로 이어진다. 그 맨 앞 중요한 자리에 정약용이 있다. 강진 시절, 열심히 떡차를 만들고 차를 달여 마시던 정약용으로부터 초의선사가 제다법(製茶法)을 배웠고, 그것이 추사 김정희에게 전해진 것이다. 정약용은 이렇게 건강도 챙기고 울화도 가라앉히면서 동시에 강진의 차 문화를 다시 정착시켰고 그것이 결국 우리 조선 후기 차 문화 부흥에 이바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양주에서도 그 차의 향기를 맛볼 수 있다. 운길산 수종사(水鍾寺) 찻집이다. 수종사에는 무료다실 삼정헌(三鼎軒)이 있다. 한강쪽으로 탁 트여 그 전망이 빼어난 곳이다. 삼정헌에는 “시(詩), 선(仙), 차(茶)를 한 솥에 담는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삼정헌에선 수종사 샘물로 우려낸 녹차를 무료로 제공하는데, 그 맛이 깊고 은은하다. 정약용은 수시로 수종사를 찾아 차를 마시고 시를 남겼다. 그의 아들 학연(學淵)과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도 종종 함께 수종사를 찾았다. 이곳을 찾으면 당연히 차를 마셨다. 모두 정약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에 수종사 약수로 우려낸 차는‘다산의 향’ ‘다산의 여운’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정약용의 차는 정신과 건강, 이념과 현실, 남양주와 강진을 모두 아우른다.
정약용은 수원 화성(華城)을 설계하고 거중기를 만들고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만들어 띄웠다. 과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여기 덧붙여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정약용은 친분이 깊었던 복암 이기양(伏庵 李基讓 1744~1802)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이기양은 천주교를 신봉했다.
“복암은 예전에 나의 형님(정약전)의 집에서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을 설치하고 거기에 거꾸로 투영된 영상을 취하여 화상의 초벌 그림을 (나로 하여금) 그리게 하였다. 공(이기양)은 뜰에 설치된 의자에 해를 향해 앉았다. 털끝만큼이라도 움직이면 초상을 그릴 수 없는데, 공은 흙으로 빚은 니소인(泥塑人)처럼 단정하게 앉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또한 보통사람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중국서 들여온 옵스큐라 카메라 원리 적용한 다산
18세기말 정약용이 칠실파려안으로 이기양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대목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특히,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이라는 단어가 이색적이다. 여기서 칠실은 어두운 방 즉 암실을 말하고, 파려안은 유리눈 즉 렌즈를 말한다. 칠실파려안은 “렌즈를 부착한 어두운 공간”이라는 말이 된다. 이는 곧 옵스큐라 카메라(obscura camera )의 원리와 같다. 사방이 모두 막힌 어두운 공간에 작은 구멍이 있으면, 실외의 풍경이 그 구멍을 통해 들어와 반대편에 거꾸로 투영되어 하나의 상(像)으로 나타난다. 반대편에 투영된 그 상을 포착하는 것이 바로 카메라 사진촬영의 기본 원리다. 놀랍게도 18세기말에 정약용은 카메라의 원리를 이해하고 활용했다. 정약용은 한발 더 나아가 이를‘칠실관화설(漆室觀畫說)’이라 명명하고 이렇게 기록했다.
정약용의 칠실파려안과 칠실관화설을 처음 확인하고 탐구했던 한국사진사(寫眞史) 전문가 최인진(2016년 작고)은 정약용 글에 나오는 내용과 동일한 조건을 만들고 직접 촬영실험을 한 바 있다. 그는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의 정약용 생가 마을과 부근의 한강변, 유배지였던 강진 다산초당 주변에서 사진 작업을 진행했다. 최인진은 정약용 칠실파려안의 원리로 촬영한 사진들을 2006년 서울 인사동에서 전시했다.
여유당 앞 실학박물관엔 조선 실학의 발자취 남아
정약용은 카메라 원리를 최초로 터득하고 실생활에 적용해본 사람이다. 정약용은 어두운 칠실에서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을 내다보았다. 정약용은 무엇을 보려고 한 것일까. 암실 구멍 밖의 세상은 때론 흔들리기도 하고 때론 흐릿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은 정약용이 살았던 18~19세기 조선의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정약용은 암실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만나듯, 조선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갈망했던 것은 아닐까.
이처럼 남양주엔 정약용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여유당(與猶堂)과 마재마을이 있고, 한국 천주교의 시원의 흔적이 있고, 조선의 차의 향기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카메라에 대한 과학적 탐구와 모험의 열정도 남아 있다. 이 모든 것은 실학으로 통한다.
여유당 바로 앞 실학박물관에서 다산의 흔적과 실학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되새겨볼 수 있다. 실학의 탄생과 전개, 실학자의 업적과 정신 등을 각종 유물로 보여주고 있지만 여기서 가장 두드러진 공간은 천문 과학 지리에 관한 전시공간이 아닐 수 없다. 보물 2032호 혼개통헌의(渾蓋通憲儀․1787년), 혼천시계(渾天時計․ 1669년․복제품),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1402년․복제품), 신곤여만국전도(新坤與萬國全圖․1708년․복제품) 등이 눈에 뜨인다. 이 가운데 혼개통헌의는 이슬람 양식의 천문기기로 흔히 아스트롤라베라고 부르는 것이다. 1787년 실학자 유금(柳琴)이 만든 것이다. 혼천시계는 1669년 과학자 송이영(宋以穎)이 제작한 것으로, 태양의 위치와 계절, 날짜를 동시에 알려주는 천문시계다. 1980년대 영국의 유명 과학사학자 조셉 니덤은 혼천시계를 두고 “인류가 기억해야 할 위대한 과학문화유산의 하나”로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이처럼 실학박물관에서 우리는 실용과 과학을 추구하고자 했던 실학의 정신, 다산의 자취를 만날 수 있다. <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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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김영사, 정민
2. 다산 정약용의 사진세계-카메라 오브스쿠라의 흔적을 되살리다, 연우, 최인진
3.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김영사,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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