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에 가보고 싶어 하는 마음, 지중해에 대한 아름다운 상상은 지중해를 배경으로 찍은 이런 영화 덕에 더 깊어졌을지도 모릅니다. 큰 입이 매력인 듯한 줄리아 로버츠 주연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이탈리아 쪽 지중해가 배경입니다. 제목이 '지중해'인 이탈리아 영화도 있습니다. 로저 무어의 '007 유어 아이스 온리'와 맷 데이먼이 나오는 '본 아이덴티티'는 각각 지중해가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그리스의 메테오라 수도원과 이탈리아 사르디니아 섬 휴양지에서 시작됩니다.
프랑스 남쪽 프로방스 지역을 배경으로 한 지중해 영화도 많습니다. 프로방스에서 그림을 그렸던 세잔과 고흐를 다룬 영화들은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한번 가봤으면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음악과 음식과 포도주를 소재로 한 지중해 영화도 많지요.
지중해를 보여주는 TV 다큐멘터리도 많습니다. 한국에서도 '걸어서 하늘까지', '세계테마기행' 같은 프로그램이 지중해를 자주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널리 알려진 관광지를 보여주더니 요즈음에는 그런 화면으로는 눈길을 끌 수 없다는 생각에서인지 현지 사람들도 잘 가지 않는 지역을 화면에 올립니다. 드론까지 띄우니 더 생생하고 자세합니다.
지중해에는 소나무가 많습니다. 이탈리아 작곡가 오토리니 레스피기(1879~1936)가 동틀 무렵 솔밭에서 옅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그려지는 '로마의 소나무'를 작곡한 것도 지중해에 소나무가 많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장 그르니에는 카뮈의 고교 스승으로 카뮈 못지않게 지중해를 사랑했던 프랑스 문인입니다. 지중해의 소나무에 관한 그의 산문 한 구절을 옮깁니다. “나는 지중해 해변에 있는 소나무들을 사랑했다. 그 잎사귀 사이로 바다를 바라본다는 것, 흠 하나 없이 완벽해 보이는 그 풍경을 본다는 것은 나에게 진정한 행복이었다.”
소나무의 붉은 몸통과 가지, 뾰족뾰족 가늘고 긴 짙은 초록 잎, 그 사이로 비치는 푸른 바다, 흰 구름, 평온, 안정, 행복 ··· 이 구절을 쓸 때 그르니에가 지중해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상상에는 모나코 바닷가 어디쯤이 그려집니다. 거기 아닌 다른 곳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키 크고 인형처럼 예쁘게 생긴 니콜 키드먼이 모나코의 그레이스 왕비 역을 했던 영화 '그레이스 모나코'의 끝부분에 소나무 숲 사이로 지중해가 투명하게 떠오르던, 참 아름다운 장면이 기억나서입니다. 그레이스 왕비는 그 부근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지요.
그런데, '북클럽-지중해 오디세이'를 준비하다가 ‘지중해학(Mediterranean Studies)’이라는 학문 분야가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지중해학을 이끌고 있는 부산외국어대학 이탈리아어학과 박상진 교수는 지중해학을 이렇게 말합니다. “근대화에서 지중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 효과는 무엇인가. 근대화는 지중해의 분열인가, 재편인가. 세계화는 지중해의 위기인가 기회인가. (중략) 유럽 중심의 테크놀로지 역사에서 중국이 그러했듯이 이슬람은 어떻게 배제되었는가. 근대화 이후 백인들이 세계의 패권을 잡게 되고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이름으로 비(非)백인들을 주변부화하는 과정에서 북아프리카와 관련된 흑인들의 역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유럽연합(Eu)의 지중해 정책은 무엇인가를 다루는 학문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지중해학은 지중해에 대한 아름다운 상상을 깨트리는 학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박 교수가 ‘지중해학’을 소개하기 위해 쓴 <지중해학-세계화 시대의 지중해 문명>이라는 90쪽짜리 책(살림출판)도 “지중해를 생각하면 어느새 우리는 고급스러운 크루즈 관광과 건강 요리, 비키니를 입은 늘씬한 백인 미녀, 파란 하늘 그리고 하얀 모래와 하얀 돌담을 떠올린다. (생략) 흔히 문명의 호수라 불리는 지중해의 기호에 깃든 이미지, 냄새, 기억은 대체로 그런 것들이다. 아니면 그렇게 구체적이지도 않고 극히 막연한 동경의 이미지만 갖고 있는 것이 더 정확한 우리의 처지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의 이미지와 기억에 담긴 지중해는 ‘하얀 가면의 제국’이 아닐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박 교수의 이 질문은, 영화가 재미있고 아름답지만 그 뒷면도 알고 있는 게 좋지 않으냐는 충고이지요. 백색 대리석 비너스만 있는 게 아니다, 검은 흑요석(黑曜石) 비너스, 아프리카의 비너스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지적이기도 하고. 또 터키가 있는 소아시아 지역도 지중해에서 빼놓아서는 안 된다는 일깨움이기도 할 겁니다.
그럼 지중해는 어디에서 어디까지인가. 내친 김에 박 교수의 책에서 얻은 지중해에 대한 지리 지식 몇 가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지중해의 역사는 워낙 길고 복잡해 여기서는 감히 덤벼들지 못하겠습니다.)
“고대 현인들은 지중해가 올리브가 자라는 곳까지 뻗어나간다고 가르쳤다. 올리브는 지중해 특산물로서, 기원전부터 지중해 교역의 주요 품목이었다. 교역은 지중해 주변의 문명권과 언어권 등을 넘어서 지중해를 하나로 묶는 것이었다. 따라서 올리브 재배 지역과 올리브를 주된 음식으로 삼는 생활 습관을 중심으로 지중해권을 구성하면, 지중해는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터키, 튀니지, 모로코, 시리아 포르투갈을 포괄하는 개념이 된다.”
“(종교를 기준으로 삼을 때) 그리스 정교를 생각하면 지중해는 흑해와 러시아까지 포괄하고 가톨릭을 생각하면 라틴 아메리카까지 뻗어나간다.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한 이래 지중해의 상징적 종교로 융성했으나, 역사적으로 이슬람은 그보다 더 강력하게 지중해를 덮었다.”
“유전학적 측면에서는 어떤가? ‘지중해 빈혈(Thalassemia)’이라는 질병이 있다. 산소를 조직으로 운반하는 혈액 단백질인 헤모글로빈 결핍이 특징인 혈액 질환으로 유전된다. 탈라세미아 유전자는 대부분 지중해 근처, 중동, 남부 아시아 등에 조상을 둔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지중해 빈혈을 중심으로 접근하면 지중해 네트워크는 지중해 연안지역과 중동 그리고 남부 아시아까지 포함하게 된다.”
“지중해라는 이름은 로마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지중해 지역을 통일한 이후에 통용됐다. 이 이름이 문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6세기였다. 로마인들은 그 전엔 ‘우리의 바다’라고 불렀고, 그리스 사람들은 그냥 ‘바다’라고 했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적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근대 이후 형성되어온 ‘지중해’는 유럽 대륙을 중심으로 이해된다는 사실이다. 유럽 이외의 지역들은 지중해에서 타자들로 분류되고 배제되면서, 지중해는 제한적인 왜소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생략) 중세 이슬람 등장 이후에 지중해에 대한 지리적 이해는 이집트를 중심으로 아프리카를 포괄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하라 사막 이북에 한정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고대에 적갈색의 피부를 가진 백인이 이집트의 지중해 문명을 관리했다고 봄으로써 실제로 지중해를 백인 중심의 문명권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지중해학은 국제지중해학협회를 중심으로 매년 지중해 지역에서 국제학회를 열고 있습니다. 지중해 연안 국가와 미국, 일본 학자, 박 교수를 위시한 한국 학자들도 참여합니다. 22회째인 올해는 그리스 크레타대학에서, 작년 대회는 시칠리아 옆 몰타에서 열렸습니다. 박 교수는 <지중해학-세계화 시대의 지중해 문명> 외에 국내 관련 학자들과 <지중해 문명의 바다를 가다>(한길사)를 공동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맘마미아 1'은 ‘에게 해’에서, 그 후편은 ‘아드리아 해’에서 촬영했다고 했잖아요? 맞습니다. 그 바다들도 지중해입니다. 지중해는 작은 바다로 쪼개져 각각 다른 이름이 붙어 있는데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여행기 작가인 로버트 카플란(1940~ )은 <지중해 오디세이>(이상욱 역, 민음사)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썼습니다. “해양학자들의 말대로 생물학적으로는 고갈되어 있고 또 많은 양의 해양 생물의 보금자리가 되는 대륙붕이 없기 때문에 원양 어선단이 없었다. 그 결과 훌륭한 선원이나 조선공이 부족했고, 그 부족함은 결국 탐험에 장애가 되었으며 바다를 더욱 불가사의한 곳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래서 지중해는 인간에게 하나의 바다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잇단 작은 바다로 되었다. 아드리아 해, 에게 해, 티레니아 해 등으로 되어있고, 각각은 고유의 낭만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비교적 작고 좁은 바다일수록 그 역사적 흔적이 더 많은 경우가 흔하다. 인간이 그런 바다를 정복한 뒤 유산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반 고흐는 파리의 화단에서 인정을 받지 못해 지중해 가까운 프로방스로 와서 그림을 그립니다. 그는 프로방스에 도착한 직후 고향에 남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북프랑스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첫 번째 올리브나무를 만나는 곳에서 너는 프로방스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나는 이 편지글을 원로 불문학자인 고려대 명예교수 김화영이 젊었을 때 낸 수필집 <행복의 충격>에서 읽었는데, 그는 “가장 행복하고 가장 비극적인 수년을 프로방스에 와서 보낸 북유럽인 반 고흐의 소용돌이치는 태양, 그의 인상주의는 이 고장에서 받은 행복의 충격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네요. 반 고흐는 이곳에서 올리브나무 그림을 열다섯 점 그렸습니다. 지중해는 언제나 풍성해 보이는 올리브가 자라는 곳까지가 맞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