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폭우로 무너진 1997년 ..가랑비에 옷젖는 2019년

2019-11-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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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악몽의 재림?

 

[이수완 논설위원]

1만달러 시대와 OECD 

1994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마침내 1만 달러를 넘어섰다. 한국전쟁 이후 10년이 지난 1963년만 해도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를 겨우 넘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의 하나였던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 1만 달러 시대 진입은 전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고속 성장의 결과였다. 두 차례의 군사 쿠데타, 국제 석유파동, 반독재 민주화 시위에 이은 노동자의 정치 투쟁 등 각종 위기와 굴곡을 겪으면서도 경제는 고속 성장을 이어 가더니 마침내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 꿈에 그리던 1만 달러 고지에 오른 것이다.

축제는 오래가지 않았다. 1997년 12월 3일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싱가포르항공을 이용하여 김포국제공항에 입국한다. 그날 저녁 외환위기에 처한 한국에 구제금융을 지원하는 내용의 합의서에 서명하면서 한국은 IMF 관리체제에 놓이게 된다. 사실상 경제적 자주권을 상실한 이날은 1910년 일본에 국권을 강탈 당한 국치일(國恥日)과 비교되기도 했다. 당시 이코노미스트誌는 "한국처럼 이렇게 빨리 부자가 된 나라가 거의 없었다. 또한 갑작스럽게 이런 굴욕을 경험한 나라도 흔치 않다"라고 보도했다.

고속 질주하던 우리 경제에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안겨준 IMF 구제금융사태는 왜 발생했나? 당시 김영삼 정부는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유지와 경제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염두에 두고 자본시장 자유화 조치와 함께 원화 강세 정책을 무리하게 유지했다. 이로 인해 수출 경쟁력 하락과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하고 있는 가운데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종금사(종합금융사)들을 통해 해외에서 단기 자본이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우리가 OECD에 가입한 1996년 외화 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1/3 수준에 이르고 이 중 단기 외채가 2/3나 차지했다. 그러나 1997년 중반 태국 바트화 폭락으로 시작된 동남아 경제위기가 한국으로 전이되면서 외국인 투자가들은 한국에서도 대규모 단기 자금 회수에 나선다. 종금사들은 단기로 차입해 국내 기업들에게 장기로 돈을 빌려줬기 때문에 외국 자본에게 당장 돈을 갚지 못하면서 부도 사태를 맞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원화의 실질적 시장 가치는 급격하게 추락했다. 그해 9월 이후 우리 외환 당국은 원화 가치를 지키기 위한 인위적인 환율 방어에 나섰고, 이에 들어가는 비용 증가로 우리의 외환보유고는 급속도로 고갈되기 시작했다. 여기다가 만기가 돌아오는 해외차입금의 규모가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여 외환지급불능사태 직전까지 몰리는 국가 부도 위기가 전면적으로 가시화된 것이다.

당시 문어발식 경영을 내세운 대기업들은 사업 진입의 장벽이 크게 완화된 자동차, 반도체, 철강 등 여러 분야에서 너도나도 마구잡이로 돈을 빌려 설비투자에 열을 올렸다. 1997년 초 부도 처리된 한보철강은 정부의 비호 아래 대규모 대출을 안고 제철소를 건설했지만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진다. 심각한 자금시장 경색으로 과도한 부채비율을 가진 대기업들이 연달아 부도의 늪에 빠지고 주식 시장이 폭락하고 외환 시장은 패닉 상태였지만, 당시 국내 언론은 우리 경제가 IMF에 구조 요청을 할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IMF행 블름버그 기사 

당시 한국의 IMF행 가능성을 처음 보도한 기자는 블룸버그 통신의 빌 오스틴 (Bill Austin) 서울 지국장이다. 1997년 11월 5일 오스틴 지국장은 한국의 가용 외환보유고가 20억 달러 수준에 불과하고, 국내 금융기관들의 자금 사정이 너무 악화되어 한국 정부가 IMF 구제를 요청할 가능성이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기사가 한국에서 엄청난 파장과 격한 반응을 가져올 것이라고 는 상상하지 못했다. 오스틴 지국장은 2006년 서울외신기자 클럽 50주년 기념으로 출판된 'Korea Witness"에 실린 기고문에서 국내 주요 언론은 과천종합청사의 재정경제원에서 회동을 가진 후 일제히 블룸버그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어떤 기사는 블룸버그를 미국 헤지 펀드와 연계된 회사로 묘사하기도 했다. 기사가 나간 후 3일이 지난 11월 8일, 토요일의 블룸버그 당직 기자는 사무실을 불태우겠다는 익명의 협박 전화를 받고 인근 경찰서에 신고하기도 했다. 그 다음 주엔 오스틴 지국장이 한국은행과 재정경제원에 소환되어 기사에 대한 해명을 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한 정부 관리는 오스틴 지국장에게 이 말을 던졌다. '"Why don't you get out of Korea yourself?" (한국에서 떠나는 게 어때요?) 당시 한국 경제의 심각한 위기와 증시의 폭락을 정확히 예측했던 스티브 마빈(Steve Marvin)의 주식시장 애널리스트 리포트 'Get Out'를 가리키면서...

블룸버그 통신의 기사가 나간 지 몇주 안된 11월 22일,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정식 요청한다. 이틀 전 금융시장 안정책 일환으로 환율 변동폭이 2.25%에서 10%로 확대되었지만. 환율은 상한선까지 치솟으며 사실상 거래 중단되는 등 금융시장은 그야말로 공포의 도가니였다. 블룸버그는 단번에 한국의 외환 위기를 잘 파헤쳐 보도한 신뢰받는 언론으로 평가가 바뀌었다. 당시 국내 재정경제원 출입기자들은 이때를 뼈아픈 자성의 기회로 삼기로 결의했다는 후문도 들렸다. 당시 남산 기슭의 서울힐튼호텔은 IMF 협상단과 구제금융 조건을 심각하게 논의하던 장소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호텔 주변의 화려한 조명 장식은 회의장 안의 싸늘하고 엄숙한 분위기와는 전혀 대조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때 도출된 IMF의 'conditionality' (융자조건)은 너무도 혹독했다. 살인적 고금리, 부실기업 퇴출, 금융시장 개방 등 IMF가 내세운 조건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기업들의 부도 및 경영 위기를 초래하였고 대량 해고와 경기 악화의 아픔을 목격했다. 아이러니하게 회담 장소 서울힐튼호텔을 소유했던 대우그룹은 800억 달러 채무로 해체되며 IMF 사태의 가장 큰 희생자가 되었다. 

오스틴 지국장은 자신의 IMF행 가능성 기사가 이렇게까지 큰 반향을 불러온 것은 한국에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회고했다. IMF 구제금융 신청 이후, 블룸버그 등 해외언론은 한국이 위기 극복과 경제회복을 위해 국력을 모아 매진하는 모습을 다룬 기사를 수없이 쏟아냈다. 특히 외환보유고 확보를 위한 '금 모으기' 캠페인에 호응하여 자신의 반지와 심지어 금니까지 내놓으려고 줄을 선 감동적인 모습에 앞다투어 찬사를 보냈다. 1997년 1만3000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은 1998년 8000달러 아래로 내려갔으나, 1999년에는 놀라운 11% 경제 성장에 힘입어 다시 1만 달러선을 회복했다. 3년 8개월의 고난 끝에 한국은 2001년 8월 IMF로부터 빌린 차입금을 조기 상환하고 경제 주권을 되찾는다. 다음 해 개최된 한·일 월드컵은 그야말로 축제의 장이었다. 축구에서 유럽의 강호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에 승리하며 월드컵 4강에 오르면서, 대한민국은 태극기의 물결 속에 하나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이때만큼 대한민국이 환호하고 일치단결한 적은 없었다. 우리 국민들로부터 '저승사자'로 불리었던 캉드쉬 전 IMF 총재는 올해 한 국내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IMF 사테 극복과 관련, "이견 없이 모든 계층이 일치단결해서 사사회 모든 계층이 일치단결해서 위기 극복에 나서는 나라는 한국말고는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IMF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 켐페인에 동침하는 시민들 모습] 

IMF가 가져온 변화와 지금의 대한민국  


IMF 사태라는 엄청난 성장통을 겪으면서 한국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시장경제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이식되었다. 과거 기업들이 정치권력과 유착해 사업 인허가와 금융 특혜 등을 통해 쉽게 몸집을 크게 불리던 관행과 무사안일주의가 타파되었다. 대기업들의 독점 방지를 위해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감독위원회가 출범하는 등 재벌 개혁이 본격화 되었다. 무엇보다도 정부의 외환 등 금융시장 정보공개와 관련 과거 팽배했던 비밀주의도 사라지며 한국 경제 상황에 대한 외부의 신뢰성이 높아졌다.

사실 1997~1998년의 고통스러운 외환 위기를 경험한 덕분(?)에 한국 경제는 2007~2008년 美월가에서 시작해서 전 세계를 뒤덮은 세계 금융위기 때 상대적으로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 정부 관리들은 10년 전 혹독한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된 위기 극복 매뉴얼에 따라 경제 정책을 집행했고 이 때문에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다.  IMF의 주문대로 많은 기업들은 부채를 줄이고 투명성과 체질 개선을 위해 노력을 시작했다. 고용 시장에도 자유경쟁체제가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정리해고가 자유로워져 정규직 근로자의 비율이 줄어들고 비정규직 근로자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연공서열의 급여체제도 연봉제로 바뀌는 시발점이 된다. 그러나 자산과 소득의 불평등과 사회 양극화 문제는 심화된다.  

IMF 외환위기는 무엇보다도 당시 관치중심의 잘못된 경제·산업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또 경제의 문외한이던 김영삼 대통령은 구제금융 신청 전 겨우 몇주 전에야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알았다고 전해진다.

지금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어섰고, 외환보유액도 4000억 달러 정도로 세계 9위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주변에서 지금 한국의 경제 상황이 IMF 외환위기 못지않게 힘들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올해 물가를 반영한 명목 경제성장률이 IMF 외환위기 이후 최저인 1%대 초반으로 떨어질 전망이다. 디플레이션 우려는 갈수록 커지고 청년 4명 중 1명가량이 실업자다. 여기다가 미·중 무역전쟁, 중국 성장률 저하, 일본과의 무역 갈등으로 인한 수출 감소···. 한국 경제는 악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김광석 한국경제산업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IMF 위기 당시는 고성장세를 유지하던 경제성장률이 단기간 마이너스로 움푹 패이는 듯한 모습이 연출되었다"며 "2019년은 저성장 국면이 고착화되는 흐름으로 잠재성장률 자체가 둔화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IMF 당시는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는 모습과 유사하고, 2019년은 이슬비에 점차 옷이 젖어드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진단했다.

세계 경제가 혼돈에 빠지면 대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는 더욱 어려워질 게 분명하다. 더 큰 걱정은 고령화와 저출산 그리고 생산성 향상 둔화로 우리의 성장 잠재력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반도 안보를 둘러싼 지정학적 위험도 커지고 있다. 분명히 우린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데도 지난 수개월 '조국 사태'에 묻혀 우리 경제에 대한 위험 신호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대한민국이 저성장의 수렁에 빠지기 전에 경제를 바로세울 마지막 기회이다.
 

[IMF] 

(이 칼럼은 지난 8월23일 출고한 '이수완의 월드비전'을 업데이트 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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