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의 책에서 책으로 24. 군중의 어리석음과 교양의 관계에 관한 책들>
메마른 나무는 작은 불꽃에도 활활 타오른다!
“민중은 소박하면 소박할수록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 쉽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 <어제의 세계> 중 로맹 롤랑의 코멘트.
“하나의 시선을 가지기에는 머리의 수가 너무 많고, 하나의 시선을 가지기에게는 눈의 수가 너무 많은 군중, 기껏 겉껍질에서 멈추며 겉껍질에 불과한 군중은 얼굴밖에 알지 못했다.”-빅토르 위고, <웃는 남자>
“독재자가 어떻게 전락하느냐고? 언론 엠바고를 푼다. 대중이 좋아할 만한 소문 등 치명적인 연관 관계들을 흘린다. 대중은 메마른 나무 같아서, 이런 불꽃들이면 불이 붙게 마련이지.”-살만 루슈디, <수치>
“그는 잠시 기다렸다. 군중이 내부에 쌓인 것을 모두 뱉어 내고 스스로 조용해지기 전까지는 그들을 강제로 침묵시킬 수 있는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미하일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
“아! 저 군중들의 머릿속에 무엇인가를 처넣어주기 위해서 도대체 어떤 책들을 써야 할지 알 수만 있다면!”-에밀 졸라, <작품>
시민/대중/군중/개인들의 이러한 소박함/어리석음은 교양이 부족하거나 교양이 파괴됐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혁명/개혁이 실패로 돌아가고 더 큰 정치/사회적 혼란이 야기됐다고 주장한 저자도 많다.
오스트리아 작가 아달베르트 슈티프터(1805~1868)가 대표적이다. 그가 1857년에 낸 <늦여름>(문학동네, 박종대 역)은 ‘1848년 혁명’의 실패에 실망을 느끼고 쓴 책이다. ‘1848년 혁명’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위한 민중혁명이었으나 실패했다. 프랑스 혁명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를 되살리려던 대의는 좋았으나 혁명세력의 분열과 폭력성과 무질서가 성공을 방해했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의 문화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담은 책으로 알려진 <세기말 빈>(김병화 역, 글항아리)의 저자 칼 쇼르스케(1915~2015, 미국)에 따르면 슈티프터는 1848년 혁명의 폭풍우가 몰아치기 전의 평온했던 시절에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확립한 사람이다. 자유주의자로, 절도 있고 독립적인 인간이었던 그는 처음엔 혁명을 환영했지만 혁명이 진행되면서 자신이 기대어 살아왔던 질서가 무너지자 공포에 질려 움츠러들었다. 이후 그는 개인에게서든 국가에서든 모든 자유에 필수적이고 본질적인 것은 질서와 열정의 통제라고 보았고 진정한 자유에는 최고도의 자기 통제, 개인의 욕망 억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정치적 혼란은 개인적 열정의 산물이며, 그 치료법은 개인적 자기 규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로운 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도덕적 개인뿐”이라는 결론에 이른 그는 1848년 말 빈을 떠나 오스트리아 제3의 도시인 린츠에 정착해 직업학교 창립 등 교육에 헌신하면서 <늦여름>을 쓰기 시작한다. 성장소설의 형식에 문학과 미술, 음악, 건축, 가구와 인테리어 등등 예술로 간주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룬 이 소설은 오직 “교양을 고양하여 도덕적 개인을 길러내기 위한 것”이 집필 목적으로 여겨진다. 니체는 <늦여름>을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에 버금가는 교양소설이라고 격찬했다고 한다.
슈티프터와 거의 동시대를 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이자 교양 있는 평론가였던 매슈 아널드(1822~1888)도 사회 혼란과 교양을 결부시킨 평론집을 냈다. 1867년에 나온 이 책은 제목부터 <교양과 무질서>(한길사, 윤지관 역)다. 영국은 1832년 1차 선거법 개정을 통해 중간계급 일부에 선거권을 부여했다. 이 개정에서 완전히 배제된 노동계급은 ‘개혁연대’를 조직해 정치·경제적 권리 보장을 요구했으며, 이 요구는 1866년 7월 23일 6만 명의 개혁연대가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집회를 개최하기로 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경찰이 공원 문을 잠그고 출입을 막았으나 노동자들은 철책을 무너뜨리고 공원에 들어가 큰 소요를 일으켰다. 급기야 군대가 출동했지만 노동자들이 이미 흩어져 더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이드파크의 ‘노동자 소요’ 1년 뒤에 나온 <교양과 무질서>에서 아널드는 노동자 계급을 직접 겨냥하지는 않았으나, 노동자 계급을 옹호(그들의 무질서까지)하면서 교양을 ‘고전에 대한 겉핥기’, 교양을 중요시하는 사람을 ‘엘리트주의자’로 낮춰 부른 논적들을 통렬히 꾸짖었다. 사회적 교양 부족이 사회적 혼란, 무질서의 원인임을 돌려 말한 것이다.
아널드는 “총명한 사람을 더 총명하게 만들기”라는 몽테스키외의 교양관(觀)을 인용한 후 “교양 쌓기는 스스로를 총명하게 하는 노력이자 이성과 신의 뜻을 널리 퍼뜨리려는 행위”라고 단정했다. 교양을 위해서는 “과학적 정열, 알고자 하는 정열과 함께 선을 행하려는 도덕적 사회적 정열의 힘도 필요하다”는 말도 남겼다.
20세기 최고의 독일 소설가로 불리는 토마스 만(1875~1955, 독일)이 말년에 내놓은 <파우스트 박사>는 독일이 히틀러의 광기에 사로잡힌 것을 한 음악가가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버린 것에 빗대고 있다. 만은 이 소설에서 “교양의 시대라고 하기엔 우리 시대에는 교양에 관한 말들이 너무 많은 것 같지 않아? 정작 교양을 소유한 시대라면 도대체 교양이라는 말을 이렇게 헤프게 입에 올리기나 했을지 의문이야”라고 썼다. 독일사회에서 진정한 교양이 사라진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최악의 혼란을 불러왔다는 생각을 말한 것으로 들린다.
슈티프터, 아널드, 만은 결국 좋은 사회란 교양에 달려 있다고 본 것이다. 교양은 컬처(Culture)다. 컬처에는 네 단계가 있다고 한다. “컬처는 기본적으로 자연 생장물의 재배를 뜻했고 그 다음에는 거기에서 유추하여 인간의, 특히 개인의 수양 과정을 뜻했다. 두 번째로는 한 사회 전체의 전반적인 지적 발달 상태, 세 번째는 예술적 총체, 네 번째는 물질적, 지적, 정신적 삶의 총체적 방식을 뜻한다.”(레이먼드 윌리엄스, 영국 문화비평가, 1921~1988)
한국사회는 첫 번째 단계도 통과하지 못했다. 두 번째 단계에 이르는 것도 한참 멀었다. 그렇기에 지금 같은 혼란을 우리가 겪고 있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