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평규 칼럼]홍콩시위, 본질에 대한 다른 시각

2019-09-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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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 발단 계기는 송환법 제정 시도

중국식 사회주의 색깔 통치에 대한 거부감

집값 폭등, 저임금, 빈부격차 심화 등에 따른 경제적 불만도

조평규 중국연달그룹 전 수석부회장.

19세기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도자기, 차, 비단 등 사치품을 수입했지만, 영국산 제품은 중국에서 인기를 끌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영국의 은이 중국으로 대거 유입되는 무역 불균형 현상이 발생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수출했고, 결국 아편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최근 발생한 미·중 무역전쟁도 연간 400조원이 넘는 미국의 대중(對中) 무역적자로 인한 무역불균형이 가장 큰 원인이다. 청 나라와 벌인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1842년 난징(南京)조약을 체결해 홍콩섬을 할양(割讓)받았다. 이어 1898년 홍콩경계 확장전문조약으로 신제(新界) 등 235개 부속도서가 99년간 영국에 조차(租借)됐다.

영국이 당시 홍콩을 극동지역의 전략적 요충지로 키우기 위해 특혜관세와 자유무역항 정책을 편 게 오늘날 홍콩이 금융과 무역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된 동기가 됐다. 1978년 중국이 개혁·개방을 선포하고 홍콩 인근에 4개 경제특구를 설치해 해외 기술과 자본을 도입한 것도 사실은 홍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결과적으로 중국이 4개 경제특구 실험 성공을 발판 삼아 동해안의 13개 항구도 개방함으로써 경제발전은 속도를 냈던 것이다.

홍콩이 중국 경제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데에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중국은 영국과의 1984년 홍콩 반환 협상에서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이후에도 홍콩의 자본주의 체제와 생활양식을 50년간 바꾸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990년 홍콩기본법이 제정됐고, 1997년 7월 1일, 156년간에 걸친 영국의 식민지배를 청산하고 홍콩은  중국에게 반환됐다.

홍콩기본법은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고는 덩샤오핑(鄧小平)이 제시한 '일국양제(一國兩制, 한 국가 두 체제)'와 '홍콩인에 의한 통치(港人治港)'와 홍콩에 고도의 자치권을 보장한다는 것이 골자다. 하지만 반환 이후 홍콩인에 의한 통치는 중국 정부에 의한 통치로 바뀌었고, 보안법의 추진, 홍콩기본법의 최종해석권은 중국의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 귀속됐다. 홍콩수장의 직선제에 의한 선출도 이뤄지지 않았다. 수익성 있는 사업은 대륙의 정치권에 관시(關係)를 가진 기업들이 차지하는 현상이 노골화됐다.

홍콩이 중국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는 했으나, 홍콩인들이 얻은 것은 별로 없다는 공감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된 이유다. 선전(深圳)를 홍콩의 금융허브 역할을 대체할 전략적 지역으로 정하는 '웨강아오대만구(粤港澳大湾區)'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홍콩의 미래가 불투명하게 된 점도 그들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홍콩인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 아주 민감한 사람들이다. 기여를 했으면 반드시 대가를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정서를 가지고 있다. 또한 100년간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하에서 살아온 사람들인데, 중국적 사회주의 색깔의 통치는 거의 모든 면에서 거부감을 키워왔다고 볼 수 있다.

대개의 정치 전문가들은 홍콩의 시위사태 발생 배경을 범죄인 인도법안(일명 송환법)의 제정 시도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송환법 제정이 대규모 시위를 촉발시킨 계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시위의 본질적인 원인은 홍콩이 중국의 발전에 기여만 했지, 홍콩인들이 얻은 것은 별로 없고 경제적 미래도 어둡다는 데 있다. 홍콩을 통해 벌어들인 돈은 대륙으로 흘러 들어가고, 홍콩을 여행하는 대륙 졸부들의 행태는 그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다.

홍콩인들의 경제적 불만의 핵심은, 부동산 가격의 폭등과 낮은 임금 수준에 따른 양극화의 심화로 젊은 층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과 불평등,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홍콩의 주택 가격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최근 10년간 집값은 3배 이상 급등했다. 보통의 아파트 조차도 1평에 1억원에 달하고, 고급주택은 평당 2억원이 넘는다. 위치가 좋은 지역의 50평대 고급아파트는 100억원에 달한다. 주택 임대가격도 대단히 높아 방 2개 정도의 아파트는 월세가 300만원이 넘는다. 닭장이라고 불리는 2평 정도의 쪽방도 매월 100만원을 내야 겨우 구할 수 있다.

홍콩의 집값 폭등을 부추긴 배경엔 홍콩 정부의 정책적 실패와 부동산 개발상의 이기심이 자리잡고 있다. 홍콩 정부는 고급주택을 짓는데 토지를 우선 할당해 서민들이 살 수 있는 저렴한 가격의 주거단지를 조성하는 정책적 배려가 소홀했다. 부동산 개발상들도 이익이 많이 나는 쪽방 주택을 많이 공급함으로써 열악한 주거 환경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중국 대륙 부자들이 홍콩 아파트를 대거 '쇼핑'한 것도 주택난을 부추긴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집을 가진 자는 더욱 부유하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집을 살 수 있는 희망 마저도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홍콩의 국민총소득(GNI)은 5만 달러에 육박하고 있으나, 중위소득은 월 280만원으로 양극화에서 오는 불평등이 우리보다 매우 심각하다. 홍콩 대학졸업자가 받는 초봉은 200만원 내외다. 법정 최저 임금은 한국보다 훨씬 적은 시간당 5800원이다. 홍콩의 화려함 이면에는 주민의 약 20%가 빈곤층을 형성해 가난에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양극화를 보여주는 지니계수(소득분배 불평등 지표)만 봐도 홍콩은 0.539로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이 심화된 도시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홍콩 청년들의 임금이 오르지 못하는 이유는 대륙에서 유입되는 양질의 중국인 고급 인력의 영향이 크다. 대륙 출신 청년들은 중국보다 몇배 많은 홍콩의 임금수준에 만족한다. 홍콩기업의 상당부분이 비용이 저렴한 광둥성의 선전이나 포산, 둥관, 광저우 등으로 본사나 공장을 옮기고, 몇몇 핵심 관리직을 제외하고는 대륙사람을 채용함으로써 홍콩의 역할과 기능을 줄인 것도 홍콩의 위상을 약하게 하는 요인이 됐다.

끝으로, 홍콩의 기존질서인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체제를 지키려는 홍콩인과,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외치는 중국 정부와의 힘겨루기 와중에서, 경제적 이익을 지키려는 홍콩인의 피나는 투쟁이 홍콩사태의 본질에 가깝다. 엄청 커버린 중국이라는 공룡을 정치적·경제적으로 홍콩인들이 대적하기에는 불가능하다는 절망감이 홍콩사태를 촉발시킨 동력으로 작용했다. 홍콩사태는 단기간에 해결될 수 없는 운명이다. 장기적이고 복잡한 양상을 띠고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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