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이의 사람들] 신은경 전 KBS 앵커가 말하는 멋있게 나이 드는 법

2019-08-23 13:29
  • 글자크기 설정


여성 아나운서 최초로 단독으로 9시 뉴스를 진행한 신은경 아나운서. 그는 여성앵커의 전설로 불리며 12년간 KBS 메인 앵커를 지냈다.

1992년에 아나운서 직을 내려놓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3년만에 저널리즘 석·박사를 취득했다.  최고의 자리에서 내리막길을 걷고 싶지 않아 공부를 선택했던 그녀는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KYWA)을 지내며 ‘고마워YO’ 캠페인을 통해 청소년들을 위해 활동했다.

현재 그녀는 차의과학대학교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번 그녀의 인터뷰를 통해 ‘멋있게 나이 드는 법’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진= 신은경 교수 제공/ 신은경 전 KBS 앵커]

Q. KBS 앵커,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 이사장 그리고 지금은 대학교수까지 지금까지 어떠한 삶을 살아오신 건가요?

A. 굉장히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방송이 하고 싶어서 아나운서가 됐는데 정말 운 좋게도 KBS 9시뉴스를 진행하게 됐어요. 전반 7년 동안은 주중에 공동 진행을 했고 후반에 5년 동안은 주말에 단독 진행을 했죠. 그래서 12년 동안 정말 멋진 삶을 살았어요.

또, 그 사이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들이 많았어요. 88년도에 서울올림픽을 했었는데 그때 메인 앵커를 하게 되는 좋은 기회가 있었고 그 전에 83년도에는 유네스코 기록유산의 중요한 자료인 ‘이산가족 찾기’라는 프로그램도 진행했거든요. 아나운서를 하면서 이런 경험들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Q. 아나운서는 말을 잘해야 된다고 하는데 옛날부터 말을 잘하셨었나요?

A. 아니요. (웃음) 어렸을 때는 정말 못했어요. 그리고 굉장히 수줍은 사람이었고요. 말수가 적고 말하는 것보다는 생각하는 게 더 많았고 수줍고 내향적이다 보니까 말을 별로 안했던 거 같아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선생님께서 제게 책을 읽어보게 하셨는데 그 기회로 제가 그 당시 다니던 진명여고의 공식 아나운서가 됐어요. 당시에는 방송반이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지명을 하셔서 무대 사회도 보게 하시고 체육대회 때 장내 방송 같은 것도 하게 하셨죠.

그때 선생님이 “신은경, 너 아나운서 해봐라. 정말 잘하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저에게 큰 동기부여가 됐어요. 그 이후 대학 들어가서 방송반 활동을 조금 했고 졸업을 한 후에 아나운서 시험을 봤어요.

Q. 아나운서가 된 후에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으신가요?

A. 네, 자주는 못 뵈었는데 어떻게 아나운서가 되었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많아서 제가 인터뷰 때마다 선생님 얘기를 꼭 해요.

그러다가 한참 지나고 선생님께서도 연세가 많이 들으셨던 스승의 날 쯤에 한번 만나뵙게 됐는데 선생님이 신문에 나온 제 기사 중 그 선생님의 이야기를 한 부분에 밑줄을 쳐서 “야 내가 이거 잘 읽었어, 여기다가 내 얘기했지?”하면서 보여주시는데 너무너무 감동인 거 있죠.

저는 늘 부족한 제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에게는 그래도 자랑스러운 제자였나봐요.

“쟤가 내 제자야, 내가 이렇게 키워서 저렇게 됐어”라고 말씀도 많이 하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생각해주셨었던 거 같아요.

Q. 교수로서는 현재 학생들에게 어떠한 것들을 가르치고 계신가요?

A. 제가 그동안 방송을 했던 사람이고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을 때 저널리즘을 전공했기 때문에 주로 저널리즘을 가르치고,특히 스피치커뮤니케이션을 정말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어요. 저는 누가 뭐라해도 스피치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학교 학생이 처음 입학을 하면 거의 전공 필수처럼 모든 학생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해놨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들어와서 아직 말하기가 어색한 아이들에게 앞으로 사회인으로서 준비해야 될 말하기를 훈련시켜요.
 

[사진= 김호이 기자/ 인터뷰 장면]

Q. 지금 대학교수로 계시지만 학생들이 태어나기 전에 아나운서를 하셨었는데, 학생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A. 처음에는 몰랐어요. (웃음) 너무 서먹서먹하고 처음에는 교수가 누가 누군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처음에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교수들이 한 사람씩 인사를 할 때 올해는 재미있게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인사를 하면서 “여러분 지금 카메라를 꺼내서 제 얼굴을 찍어서 부모님께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 우리 교수라고 카톡을 보내서 실시간으로 반응을 받아보세요”라고 했어요. 그 중에서 가장 핫한 반응이 온 사람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했죠.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왔다가 “저 분이 옛날에 유명했던 분이래”라고 알게 되기도 하고, 부모님 중에서는 학생에게 “어머? 그분 굉장히 유명한 분이야, 잘 배워 와”라고 말씀하는 분도 계셨어요.

처음에는 무심한 얼굴이었던 친구가 “교수님, 우리 엄마가 잘 아신데요, 잘 배워오라고 하셨어요.”하면서 갑자기 어느 순간 친근해지죠. 심지어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기억해주시는 분도 계시는데 저로서는 굉장히 감사하죠.

Q. 신은경 교수의 대학시절은 어떠셨나요?

A. 저의 대학시절은 그렇게 자랑스럽지는 못했어요. 1차 대학에 떨어져서 2차 대학에 갔어요. 저희 어머니는 재수를 하라고 권하셨는데 재수를 할 자신이 없어서 2차 대학에 갔고 그래서 열등감이 많았어요.

다른 학교는 햇빛이 내리쬐는 봄이 됐는데 저희 학교는 봄이 안 오는 거 같았어요. 그래서 3년 동안은 대충 학교를 다녔어요. 공부도 제대로 안하고, 집이 머니까 좀 늦으면 아예 안갔어요. 그러면서 제가 학교의 영자 신문반과 방송반을 했는데 사실 방송반과 영자 신문반은 성격이 극과 극인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활동이었어요.

영자 신문반은 굉장히 진지하고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였고, 방송반은 사회의 방송국처럼 경쟁하고 서로 살벌하고 지켜보고 잘못하면 비난도 하고 긴장해야 했어요. 이 두 가지의 활동을 하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었죠.

근데 방송반을 하면서 실제 방송국에 연수를 갈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실제 방송국의 모습을 보고 정말 여기 와서 일하고 싶다는 제 마음을 발견하게 됐어요.

Q. 자신은 흙 묻은 수저라고 표현을 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유가 무엇인가요?

A. 요즘 사람들이 금수저, 흙수저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근데 이게 부모를 잘 만나서 부잣집에 태어나서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면 금수저라고 하고, 부모님이 가난하게 낳아주시면 그때부터 '잘될 방법이 없다, 평생 힘들게 산다'는 뜻으로 흙수저라고 말을 하는데 저는 거기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어요.

우리는 부모님이 세상에 나온 아이를 받아들였을 때의 그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그 귀한 아이를 이 세상에 무엇과 바꾸겠어요. 너무너무 기쁘고 감사하고 놀랍고 그런 아이를 받아 들였을 때의 기쁨은 누구나 금수저만큼이나 가치가 있어요. 가난한 아이라고 조금 기쁘고 부잣집 아이라고 10배, 100배 기쁜 거 절대 아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다 금수저로 태어나요.

물론 이후에 갑자기 사업이 망할 수도 있고 돈이 없을 수도 있고 학교에 실패할 수도 있고 어려움들이 많아요. 흙을 묻힐 수도 있다는 거죠. 그렇지만 흙 좀 묻히면 어때요? 그걸 털면 영원한 금수저 잖아요.
모든 사람은 그 사람의 가치로 봤을 때 다 금수저라는 이야기예요.

저는 2남2녀의 맏이인데 아버지가 제가 중학교 2학년 올라갈 때 출근길에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그때부터 굉장히 힘들었죠. 대학도 2차로 들어갔고, 방송국도 1차 카메라 테스트 30초~1분 보고 떨어진 적도 있었고 두 번째 지원했을 때는 마지막 면접까지 됐는데 1980년도에 방송통폐합으로 인해 없었던 일로 무산이 됐어요.

그러다가 5~6개월이 지난 다음에 81년 4월에 KBS에서 신입사원 모집이 있었고 5월달에 합격이 된 거예요. 그런 어려움을 많이 겪었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흙수저였던 저의 삶을 통해서 어려운 사람들을 이해하게 됐거든요. 그래서 사실 너무 감사해요.

Q 교수 그리고 아나운서 모두 말을 하는 직업인데 신은경 교수만의 세상과 소통하는 법이 있나요?

A. 그때 그때 소통의 대상들이 있잖아요. 아나운서일 때는 국민들이 저의 청중이었고 청소년 기관에서는 청소년들이 위주가 됐었지만 지금은 대학 교수라서 수업에서 학생들을 만나잖아요. 그때 그때 그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요.

아나운서였을 때는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이름이 알려지고 유명해지고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제 뉴스를 보고 듣거나 인터뷰를 통해 사람들이 보고 느끼고 용기를 얻거나 같은 직종에 종사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하는 것들이 선한 영향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사람은 말도 조심하고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하는게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생각지 못한 곳에서 영향을 받으니까요.

지금은 비록 한 학년에 50명 아이들을 맡아서 지도를 하지만 그 순간에 그것만 가르치는 것은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이 아이들이 인생 속에서 어느 때에 “내가 대학 다닐 때 이런 교수가 있었는데 그 교수님이 이런 가르침을 줬는데 그 이후로 내 인생이 바뀌었어”라고 말할수만 있다면 저는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그걸 가장 중요시 여기고 있어요.

Q. 주철환 전 PD 그리고 안도현 시인을 비롯해서 대부분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교수가 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렇다면 신은경 교수께서 교수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일단은 가르치는 일이 재밌었고요. 계속해서 이 분야에 대해서 연구를 할 수 있잖아요.

그게 교수의 일이니까 그동안 자기가 배우고 관심있었던 분야를 계속해서 연구하고 그걸 또 아이들한테 가르치고 연구한 결과를 세상에 알리고 하는 작업들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연구실에만 묻혀 있는 사람은 못 될 거 같아요. (웃음) 저는 관심이 너무나 많아서 하는 일이 너무 다양하고, 논문보다 책들을 많이 쓰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교수로서도, 학문적으로의 업적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제가 관심 있는 분야를 맛보고 영향을 받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쪽으로 하고 싶어요.

그러다 보니까 책을 쓰게 됐고 외부강연도 굉장히 많이 하고 있죠. 이런 것들을 통해서 더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차의과학대학교 교수가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한다는 것으로 학교도 많이 알릴 수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좋은 거 같아요.

Q. 아나운서 그리고 교수, 엄마, 사람으로서의 신은경은 어떠한 사람인가요?

A. 그냥 부족한 대로 굉장히 열심히 사는 사람이에요. 제가 가진 것중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그냥 '열심히 하는 것'.

능력이 뛰어나거나 누구보다 훨씬 잘났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진지하고 성실하게 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저는 제가 어느 조직에 속하든 '신은경 임팩트'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KBS의 아나운서가 됐으면 신은경으로 인해 KBS가 빛날 수 있는 사람, 대학의 교수가 되었더니 그 학교에서 신은경 교수 덕분에 학교의 위상이 높아졌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거죠.

Q. 은퇴 후에 가장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A. 거창한 계획은 따로 없지만 글을 계속 썼으면 좋겠어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삶의 길목마다 만나는 사람과 상황, 사회의 이야기들을 잘 관찰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보면 소재들이 굉장히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걸 차곡차곡 기록하면서 계속해서 책도 쓰고 목소리와 건강이 허락한다면 강연도 계속 하고 싶지만 삶의 속도는 좀 늦추고 싶어요. 이제는 바쁘게 사는 건 싫고 내가 조용히 생각할 수 있는 힐링의 시간들을 마련하려고 하고 있어요.

Q. 신은경 교수가 생각하는 멋있게 나이 먹는 법은 무엇인가요?

A, 이건 정해진 답은 없어요. 자기답게 나이 드는 것이 최고죠. 건강이나 형편이나 재정 상태나 자기의 취향 등을 따져서 자기답게 살아야 돼요.

자기를 잘 돌아보면서 '나는 이런 걸 하고 있을 때가 제일 행복했어'라는 부분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런 부분을 자신에게 맞게 해나가는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인생을 전반과 후반으로 나눈다고 생각하면 은퇴 후는 후반전 인생이잖아요. 전반과 후반을 비교했을 때 전반에는 속도가 중요했어요. 빨리, 많이, 높이요. 이런 것처럼 전반의 인생이 '성공을 위해 달려온 삶'이라고 봐요.

후반의 인생은 '성공보다 의미 그리고 속도보다는 방향성'이 중요해요. 떼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내가 인생 전체에서 배웠던 것을 남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면서 살지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Q. 마지막으로 자신의 제2의 인생 그리고 노후를 어떻게 준비해야 될지 막막해 하는 사람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A. 타이밍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은퇴 때까지 아무 생각 없다가 은퇴를 하면 이것처럼 난감한 일이 없어요.

책에서는 40~50대부터 노후를 생각하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어떻게 나이들어 갈 것인가', '내가 60 이후에 은퇴를 하면 어떤 삶을 살까?'

이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천천히 심리적인 준비와 재정적인 준비 등을 생각하면서 노후를 준비하는 거죠. 적어도 한 달에 최소한의 생활비 정도는 나와서 굶어죽지 않고 당황하지 않을 정도로 어떤 형태로든 나와야만 해요.

자식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좋지만 돈의 액수로 나눠주는 것보다는 정신적인 유산이나 교육을 시켜주거나 좋은 직장을 갖게 하는 것들이 유산일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자립하게 되면 자기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게 독립을 시키고 부모님은 내 삶이 마감될 때까지 적어도 누구에게 의지 하지 않고 내 병원비는 내가 내고 내가 먹고 사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사진= 김호이 기자/ 신은경 전 앵커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