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교의 골프& 休] ‘메이저 퀸’ 품은 고진영, ‘할아버지 고향’ 제주가 준 선물

2019-08-0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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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제주에서 보낸 여름은 고진영을 바꿔 놓은 시간이다. 무더위와 비바람이 얄궂게도 기승을 부리던 시기. 고진영은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하반기 첫 대회였던 제주삼다수 마스터스 출전을 위해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에비앙 챔피언십 우승이 확정된 뒤 두 손을 번쩍 들며 감격하고 있는 고진영. 사진=EPA 연합뉴스 제공]


그해 제주행은 조금 특별했다. 대회 개막을 일주일 앞두고 일찌감치 제주 땅을 밟았다. 상반기 우승을 못해 속이 타던 때다. 고진영의 선택은 독한 연습이 아닌 휴식이었다. 투어 활동 4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여행을 떠났고, 여행지가 바로 제주였다.
한라산 백록담에 오른 고진영은 눈앞에 펼쳐진 고즈넉한 풍경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말 아름다웠다. 구름이 내 옆에 있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는지, 힘들었던 것이 생각이 나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젠 더 즐기면서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명상에 잠겼다.

고진영은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 대회 둘째 날 신들린 8연속 버디 쇼를 펼친 뒤 마지막 날 악천후를 뚫고 짜릿한 역전 우승 드라마를 썼다. 이후 고진영은 2승을 더 추가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에비앙 챔피언십 출전을 포기하고 나선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에서 생애 첫 타이틀 방어에 성공한 뒤 국내 유일의 LPGA 투어 대회였던 KEB하나은행 챔피언십까지 제패해 미국 진출의 꿈을 이뤄냈다.

LPGA 투어 데뷔와 함께 신인상을 수상한 고진영은 올해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올라섰다. 4월 ANA 인스퍼레이션 우승으로 생애 첫 ‘메이저 퀸’에 오른 고진영은 지난주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다시 정상에 올라 ‘메이저 2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세계랭킹 1위를 탈환한 고진영은 상금랭킹, 올해의 선수, 평균타수 등 주요 타이틀 부문 선두 자리도 꿰찼다.

고진영이 올해 가장 빛날 수 있었던 건 2년 전 출전을 포기했던 에비앙 챔피언십 제패였다. 이번 대회도 꼭 2년 전 제주삼다수 대회 때와 비슷했다. 악천후로 경기가 2시간이나 지연되는 등 날씨 변수로 선두권 선수들이 주춤했다.

어수선한 틈에서 고진영은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고진영은 고등학교 때부터 가진 신앙의 힘도 큰 도움이 됐다. 경기가 지연될 때마다 차분하게 설교 말씀을 들으며 기도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그 시간이 참 감사했다”고 털어놨다. 결국 고진영은 대회 마지막 날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으로 우승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역전 우승을 이뤄냈다.

고진영은 1일 영국 런던 북부 워번 골프클럽에서 개막하는 시즌 마지막 메이저 대회 브리티시 여자오픈에 나선다. 한 시즌 ‘메이저 3승’에 도전하는 무대다. 단일 시즌 메이저 3승을 거둔 선수는 2013년 박인비를 포함해 LPGA 역사상 단 4명밖에 없었다.

고진영은 대회 1‧2라운드에서 넬리 코다(미국), 스즈키 아이(일본)와 같은 조로 나선다. 최근 악화된 한일 관계로 대회 첫날부터 펼쳐지는 한일전도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브리티시 여자오픈을 앞둔 고진영은 “2주 연속 우승과 한 해에 세 번이나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면서도 “그런 부담감을 느끼기보다는 일반 대회처럼 생각하겠다. 만약 이번에도 우승하면 대단한 일이 될 것”이라고 다짐했다.
 

[시상식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울음을 터뜨린 고진영. 사진=AP 연합뉴스 제공]


고진영은 브리티시 여자오픈을 마친 뒤 오랜 만에 고국 나들이에 나선다. 한라산의 기운을 받아 ‘깨달음’을 얻었던 제주삼다수 마스터스에 출전한다. 금의환향이다. 특히 병상에서도 TV로 손녀의 골프 치는 모습을 빼놓지 않고 챙겼던 고진영의 할아버지가 제주 출신으로 남다른 애정이 있는 곳이다.

고진영의 할아버지(고익주 옹)는 지난해 4월 세상을 떠났다. 당시 고진영은 미국 하와이에서 열리는 롯데 챔피언십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부상 소식을 들은 고진영은 대회 출전을 포기하고 곧바로 귀국했다. 고진영은 생애 첫 ‘메이저 퀸’에 오른 뒤 “지난해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마 살아계셨다면 기뻐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을 것”이라며 애틋한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이번 대회는 위상이 달라진 고진영의 출전으로 구름 갤러리가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 제주삼다수를 생산 판매하는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는 이미 ‘고진영 효과’로 대회 관련 문의가 빗발치고 있어 흥행 예감에 신바람이 났다. 

올해 상금 2억원을 증액해 총상금 8억원이 걸려 있는 제주삼다수 마스터스는 9일부터 사흘간 제주시 오라 컨트리클럽(파72)에서 개최한다. 올해 대회에는 고진영과 함께 삼다수의 서브스폰서 후원을 받고 있는 ‘골프 여제’ 박인비도 출전할 예정이다.

고진영의 이번 제주행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휴식 같은 곳, 제주로 '메이저 퀸'이라는 선물을 안고 돌아온다.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실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나 잘했지?"라며 자랑삼아 감사의 인사를 나누지 않을까. 어쩌면 자랑해야 할 왕관이 세 개로 늘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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