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글로벌 분업으로 성공한 나라다. 수출은 우리나라 생명줄과 같다. 국내총생산(GDP)의 70%를 수출에 의존한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10여년을 매달 수출진흥회의를 주관하고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펼친 게 '무역대국' 오늘의 한국을 만들었다.
최근 갈등을 빚는 이웃국 일본과 비교해 봐도, 한국은 GDP 대비 무역의존도가 69%로, 일본(28%)에 비해 2.5배가량 높다. 한국의 경제구조는 그만큼 글로벌 환경 변동에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
일본이 기습적으로 한국기업에게 베풀던 반도체 관련 핵심소재 수출 우대혜택을 철회하고 수속을 까다롭게 한 것은 글로벌 자유무역의 밸류체인(가치사슬)에 대한 명백한 반칙 행위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고의적이고 교활한 기습공격은 상당히 계획된 도발로 보인다. 원하진 않았지만 일본과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국민의 도리로 힘을 보태야 한다.
다만, 이 지경에 이르도록 우리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일본에게 침략을 당하거나 합병되는 치욕을 당할 때에는 항상 무능한 정부가 있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일본산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차량, 맥주, 패션, 식음료, 건강식품, 약품 등 다양하다. 일본산 불매운동에 편승해 애국마케팅도 활기를 띠고 있다. 자유무역을 경제의 근간으로 하는 나라가 불매운동 같은 보호무역행위를 한다는 것은 자해 행위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외제상품 배척운동은 단기간 감정적으로 만족을 얻을지는 모르나, 오래가지도 못하고 대개 실패한다. 양국 정부나 언론이 앞장서서 국민감정을 자극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이 사드(THAAD, 고고도방어미사일체계) 배치에 대한 보복으로 관광객의 송출을 제한하고, 한국산 제품에 대한 비관세 장벽을 높이고,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에게 불리한 처분을 내린 적이 있다. 중국의 이러한 처사에 한국인들은 엄청난 실망과 분노를 표출했다.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한 보복하는 차원에서 우리 역시 과거 중국이 했던 행위를 답습하는 건 우리의 의식이 중국 수준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정부는 경제와 나라의 운명이 걸린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인 민족주의에 호소하면서 내부 분열을 일으키는 발언을 내놓고 있다. 일본이 한일합방을 통해 우리에게 깊은 고통을 준 행위는 어떤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다. 시시하게 배상이 어떻고 보상이 어떻고 따질 일이 아니다. 일본으로부터 당한 치욕과 울분을 가슴에 새기지 않고 사는 한국인은 없다. 그러나 미래를 위해 일본과 대화하고 싸움을 말리려는 기업인들이나 협상론자들을 토착 왜구, 친일파, 이적 등으로 낙인 찍어 공격을 가하는 것은 참으로 편협한 태도다.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매도하는 세력들은 정치적, 이념적으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국익을 해치는 자들이다. 지지세력 인기에 영합한 자극적이며 감정적인 민족주의, 이념이나 과거사에 매달리는 사고는 선거에서 표를 얻는 데 도움이 될지 몰라도, 국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미래를 향해 한발자국도 나아가기 어렵게 만든다.
최진석 교수(서강대 명예교수)는 ‘과거에 갇히면 망하고, 미래로 나아가면 흥한다. 과거를 정리하지 않고, 어떻게 미래를 열수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은 평생 과거만 정리하다가 보낼 가능성이 클 뿐 아니라, 미래를 열 생각도 없다’고 말한다. 명분에 집착하는 것은 과거지향적이며, 실질과 변화를 받아들여야 미래를 열 수 있다.
일본은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얼마든지 협상을 통해 해결이 가능하다. 양국간 갈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는데도 외교부의 존재감은 보이지 않는다. 국가간 문제가 발생하면 양국 최고지도자가 만나 해결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우리나 일본이나 먼저 해답을 정해 놓고 하는 협상은 실패한다. 자기가 옳고 상대의 잘못만 이야기하는 대화는 하나마나 한 일이다. 개인이나 국가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신뢰 문제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고 했다. 신의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조평규 전 중국 연달그룹 수석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