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태산이다. 21일 일본 참의원 선거 개표방송에 출연한 아베가 자신의 입장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확신한 듯 다시 내뱉었다. “한국의 대응은 청구권 협정에 위배된다. 한국이 제대로 된 답을 가져오지 않으면 건설적 논의가 어렵다.” 선거가 이 갈등의 변수가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은 저 한 마디에 날아갔다. 이튿날인 22일 그는 도쿄 자민당 본부에서 다시 성토를 이어갔다. “한국은 국가 간 약속을 안 지키는 나라다. 한·일 청구권 협정 위반은 양국 국교 정상화의 근간인 국제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아베는 자신이 주장한 원점에서 꼼짝하지 않고 한국의 태도만 바꾸라고 앵무새 같은 소리로 압박한다.
대체 아베는 뭘 믿고 그러는 걸까. 섬뜩한 여론조사 자료가 하나 있다. 동아시아연구원은 일본의 비영리기관인 언론NPO와 함께 2013년부터 한·일 양국에서 상호인식 조사를 해왔다. 6년 전 조사에서는 한국인의 76%가 '일본이 싫다'고 밝혔으며 일본인의 37%가 '한국이 싫다'고 응답했다. 2019년 5월(일본 수출규제 이전)의 조사에서는 한국인 49.9%가 일본이 싫다고 했고, 일본인 49.9%가 한국이 싫다고 했다. 서로를 혐오하는 비율이 양쪽 다 절반가량으로 같아진 것이다.
한규섭 교수(서울대 언론정보학과)에 따르면, 2016년에 설문이 아닌 '심리학적 방법론'에 의거한 조사를 해봤더니 일본인들의 반한(反韓) 감정이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즉, 역사적 가해자였던 일본인들은 이전의 설문조사에서 마음속의 가책 때문에 내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셈이다. 그런데 올해의 조사에선 마음속에 숨기고 있던 일본의 ‘반한감정’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더 이상 한국에 빚진 것이 없다는 심리가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노골화(露骨化)한 여론을 아베가 업고 있다. 이것이 현 사태를 움직이는 중대한 동인(動因)이다.
아주경제는 인사이터즈 지면(22, 23면)에서 일본 참의원 선거 이후의 한·일을 전망하고 ‘생각의 판’을 펼쳐 함께 고민해보기로 했다.
아시아리스크모니터 노다니엘 대표는 개표 결과가 아베에게 일정한 ‘날개’를 달아주긴 했지만 개헌 의석을 확보하지는 못했기에 ‘무기’를 확보하지는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아베는 전쟁 가능국으로의 개헌을 밀어붙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보수성향을 가진 국민민주당을 설득하고 ‘후계’ 정치가인 고노 다로(외무상)와 스가 요시히데(관방장관)를 활용해 개헌 분위기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 국가와의 관계개선을 주장하던 고우치카이가 이번 선거에서 대패한 것도 우리에겐 불길한 조짐이다.
이런 전망과 함께 노 대표는 한·일관계에도 ‘뉴노멀(새로운 규범기준)'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고 주장한다. 아베가 무모하고 일시적이고 예외적이란 한국인들의 판단은 틀렸다는 것이다. 1965년 이후 한국과 관계를 맺어온 일본인들의 시각은 지금 '피곤한 한국'이라는 관점으로 응집하고 있다. 이 놀라운 상황을 직시하지 않으면, 향후의 협상과 교섭들이 더욱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을 노 교수는 강조한다.
이쯤에서 아까 아베의 앵무새 압박에 대해 우리 정부는 뭐라고 말했는지 들여다보자. "지금까지 한국 정부가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한·일 양국 간 미래 협력을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선을 지키며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게 양국민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답변은 양쪽이 원론에서 한치도 물러나지 않은 채 서로에게 물러나라고 밀어젖히면서 대립각만 세우는 '요령부득'의 응답으로 보인다.
주재우 교수는 한국 쪽을 들여다본다. 우선 정부가 “우리 경제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즉, 우리가 잘나가는 것에 일본이 아니꼬워서 그런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지에 가깝다고 비판한다. 또 미국의 중재 요청을 전략도 없이 막연하게 바라는 것이나, 세계무역기구(WTO) 일반이사회에 일본의 ‘만행’ 설명을 위한 통상대표단을 보내는 모습은 구한말의 막연한 기대를 품은 ‘헤이그 밀사’ 풍경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이해 없이 섣부른 외교대응을 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얘기다.
주 교수는 정부나 여당이 벌이는 어이없는 매국·친일 선동을 빨리 내려놓고, 냉철한 지략으로 만만찮은 난국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라고 말한다. 그는 우선 정부가 ‘정정당당함’으로 제대로 시비를 가리는 자세로 나아가는 게 가장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국제중재를 두려워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다. 또 현실적으로 강제징용 배상에서 국내해법으로 부족했던 2%를 채우는 실질적 방략을 짜라고 말한다. 이 시점에서 진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매국(賣國)이라는 그의 말은 귀담을 만하다.
임병식 위원은 우리 대법원 판결에 대해선 일본 지식인들도 동조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가 지레 자신감 없는 태도를 보일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힘의 논리로 송곳니를 드러내는 아베에게 같은 방식으로 승부할 것인가. 그건 다른 문제다. 의도적 무례함을 보이면서 우리의 허점을 찾으려 하는 그들에게 우리 정부가 휘말려드는 어리석음을 범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원국가무여일본실화(願國家毋與日本失和)'라는 신숙주의 충언이 귀에 들어온다. 임종에 이르른 그가 성종에게 한 말이다. "원하옵건대 이 나라가 일본과의 관계에서 평화외교를 놓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이 충고는 조선 역사를 꿰뚫는 지혜로운 말이었으나, 역대 리더들이 이를 무시하면서 수 차례 변란을 겪고 만다. 문제는 자존심이나 당장의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나라의 평화에 있다. 옛사람도 알았는데 우린 왜 이렇게 비좁게 천착하는가. 싸움에서 건질 것보다 평화에서 얻을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오늘의 아주경제 칼럼들 속에 들어 있는 긴급한 지혜와 상식의 결을 음미해 볼 시간이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