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관상 요즘 미국 경제는 그야말로 순풍에 돛을 단 듯한 모습이다. 이달(7월) 경기는 글로벌 금융 위기 직후인 2009년 6월 이후 121개월째 확장세를 이어갔다. 전미경제연구소(NBER)가 경기변동 순환사이클을 측정하기 시작한 1854년 이래 가장 긴 경기 확장이 지금 진행 중인 것이다. 직전까지의 가장 긴 경기확장(1991년 3월~2001년 3월까지 120개월)을 넘어선 것으로 이제 ‘기나긴 확장 사이클’이 미국 경제의 뉴노멀이 되고 있는 모습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경제가 사상 최고의 모습이라고 자랑을 늘어 놓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 반대로 미국 경제는 놀라울 정도로 취약하다는 지적이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다. 포브스는 20일(현지시간) 현재의 경기 확장이 기록적으로 가장 길지는 모르지만 2009년 이래 겨우 25% 성장에 그친 사실을 지적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훨씬 짧은 경기 확장 기간에 각각 38%와 43%나 성장했다.
美 경기가 최고라는데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이달 말 기준금리 인하를 기정 사실화하고 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지난 10일(현지시간) 하원 금융위원회에 출석해 금리인하를 강력 시사하면서 '불확실성'이라는 단어를 26번이나 언급했다. 미·중 무역전쟁뿐 아니라 다른 위험 요소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수치상으로 경기 상승세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지만 과거의 경기호항 시절과 달리 미국인 근로자들의 호주머니 사정은 최악이다. 연준 조사에 따르면 성인 10명 중 4명은 긴급한 상황이 닥쳐도 400달러의 비용을 현금 또는 저축으로 충당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근로자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 이면엔 불안전 고용 (underemployment)이 자리 잡고 있다. 즉, 노동의 의지와 능력을 갖추고 취업을 희망하는 사람이 고용되지 못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최근 미국 경제의 질적인 성장과 고용 안정을 가로막는 구조적인 문제로 경제학자들이 자주 거론하고 있다.
노동 패러다임의 대변화
4차 산업 혁명시대 노동 시장은 패러다임의 대변화를 겪고 있다. 이런 가운데 대학 졸업생들이 늘어나면서 고학력자가 자신들이 원하는 좋은 직장에서 당장 정규직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크게 줄고 있다. 대졸자들은 고액의 학자금 대출 상환과 당장의 생계를 위해 눈높이를 낮춰 학위가 필요 없는 단순한 일자리를 찾고 있다. 최근 뉴욕 연방준비은행 조사에 따르면, 22세에서 27세 사이의 근로자 중 불안전 고용상태는 41.3%에 이른다. 실업률이 5.9%에 이르던 2002년 11월 당시와 비교할 때보다 3%포인트가량 높은 수치이다.
디지털 기술 경제의 발달로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의 고용 형태는 일대 변환기에 있다. 무엇보다도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는 줄어들고 신개념 근무형태인 '긱 경제(gig economy)'가 빠르게 확산 중이다. '긱'이란 1920년대 미국의 재즈 공연장에서 그때그때 주변의 연주자를 구해 단기 공연 계약을 맺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경제학자들은 이 용어를 빌려 산업현장에서 필요한 인력을 단기 계약직이나 임시로 잠깐씩 맡기는 형태를 '긱 경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아마존이나 우버 등 기업들이 제공하는 디지털 일자리 플랫폼을 통해 근로자들이 한 직장에 매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일을 할 수 있는 형태이다. 미국에는 2~3개 직장에서 그야말로 '날품팔이'하면서 주 80시간 이상 일하는 '파트타임(part-time)' 근로자도 허다하다. 이런 고용 형태는 특히 중소기업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사내 핵심 정규직 직원을 최소화 하면서 외부에서 수시로 임시직 채용이 가능해지면서,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현재 미국의 노동시장에서 임시직이 차지하는 비중을 최대 20%로 추정한다. 그 비중은 최근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일자리가 계속 줄어들면서 앞으로 10년 내 미국 경제 활동인구의 절반가량이 긱 경제 형태로 일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긱 경제가 노동시장에 '유연성'을 제공하면서 경제 활력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에 대한 부작용 확대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많은 임시직 근로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일한 만큼 페이를 받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연금이나 헬스케어, 사내 복지 등 다른 혜택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직업 안정성(job security)이다. 직업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근로자들은 제대로 된 자신의 인생 설계가 불가능하다. 또한 정규직 근로자와 달리 소속감과 자긍심 등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늘날 기업들은 공급 과잉의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비용 절감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핵심 기술개발·디자인·전략·마케팅 부문 등을 제외하고는 아웃소싱이 대세다. 미국에서 최고 직장의 하나로 꼽히는 구글에서도 현재 정규직보다는 계약직을 더 채용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기업들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정규직을 계약직으로 대체시키고 임시직 이용을 확대하는 것이 이미 보편화된 현상이다. 임금과 복지 등에서 일류 정규직과는 비교가 안되는 소위 '이류(二流) 근로자(second-class workers)'의 양산은 21세기 들어 미국 사회의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다. 즉, 미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중산층 기반이 '부식'되고 있는 형국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반침체' (semi-slump)
영란은행의 통화정책위원을 지낸 데이비드 브랜치플라워 (David Blanchflower) 다트머스대 경제학 교수는 최근 “Not Working: Where Have All the Good Jobs Gone?"이라는 책을 냈다. 미국이나 영국 등 실업률이 4%대 아래인 이 시점에 '그 많은 좋은 직업들이 어디로 사라졌나'라는 제목이 잘 어울리지 않을 법도 하지만 블랜치플라워 교수는 이 책에서 서방 세계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반침체' (semi-slump)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당국이 발표하는 고용지표 헤드라인의 이면을 볼 것을 독자들에게 주문한다. 즉 불완전고용 지표가
경기 침체 이후 상황을 더 잘 설명해준다는 얘기다. 직업 안정성(job security)은 근로자 행복의 근본이지만 현재 안정적이며 고임금의 좋은 일자리는 사라지고 고학력 취업희망자들은 직업의 사다리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갈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한다. 극히 미약한 임금 상승 동향도 서구 경제가 아직 불황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신호이다. 그는 영국에서 실질 임금이 지난 10년간 오르지 않았고, 2018년 임금 수준은 10년 전인 2008년 대비 5%정도 감소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블랜치플라워 교수는 미국이 아직 완전한 고용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 그는 불완전고용이 미국 사회에 절망감과 마약을 확산시키고 자살률 증가의 원인도 된다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불안전 고용 문제를 유럽과 미국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과 연관시키고 있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과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도 오늘 서구 중산층 근로자들의 절망과 분노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지난해 말 미국의 금리 인상은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최근 나타난 미국의 장단기금리 역전 현상에서 보듯이, 미국 경제가 겉으로는 최장기 확장세에 있지만 내부적으로 경기 침체에 대한 불안감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는 의미이다. 2020년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이 파월 연준 의장을 압박해 금리 인하기조로 돌아서게 만든 것도 향후 미국의 경제 환경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토록 중국과 무역전쟁에 열을 올리는 이유도 이러한 배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위 기사는 7월 12일자 칼럼을 다시 업데이트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