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기구(ILO) 100주년 총회가 지난 6월 10일 개회하여 21일에 폐회했다. 국제노동기구는 1944. 5.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총회에서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는 원칙을 천명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치가 변화하는 ‘노동시장’의 맥락으로 노동을 상품인 것처럼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 이 관점은 ‘수요와 공급의 균형에 따라 특정 노동자의 임금이 합리적으로 정해진 것이다’라는 해석에 따라 이러한 현상을 수긍한다.
노동을 상품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일자리는 적고 일하려는 사람은 많으면 임금이 내려가고, 일자리는 많고 일하려는 사람이 적으면 임금이 올라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그리고 ‘정부가 최저임금제 등으로 노동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국제노동기구가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고 말한대로, 적어도 노동의 가격만큼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이유로 전투기조종기술을 가진 사람이 사회에 많이 배출된다면, 조종사가 많으니 가격이 낮아진다는 시장 논리에 따라 전투기조종사의 대우가 내려가야 할까? 일반 시장원리에 따른다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노동은 상품과 달리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으면, 가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구직 경쟁률이 높아지도록 설계된다. 노동의 가치는 그 업무의 중요성에 따라 당위적으로 정해져야 한다. 이 점이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는 원칙의 핵심 요소이다.
과거에는 대졸자가 적었다. 현재에는 대졸자 수가 증가했고 회사들은 쉽게 대졸자를 채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대졸자의 처우가 내려가지는 않았다. 대신 입사경쟁률이 높아졌다. 과거에는 행정고시 수준의 고등교육을 받은 학생이 소수였다. 지금은 고등교육을 받기 쉬워졌고 행시 경쟁률이 상승했지만 행정고시의 대우가 내려가지는 않았다. 과거에는 석사학위만 있어도 교수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고학력자가 적었다. 이제 교수가 되려는 박사가 많다. 하지만 교수의 대우를 하락시키려는 시도는 없다. 사회는 능력을 가진 자를 교수로 유인하게 위해 2급 대우를 하는 것이다. 수요와 공급에 따라 ‘2급이 아니면 교수를 채용할 수 없으므로’ 2급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기자에게 상당한 대우를 하며 소위 ‘언론고시’라 불리는 경쟁률을 유지하는 건, 높은 대우가 아니면 기자를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전기가 흐르는 고압전선을 다루는 활선전공의 임금이 높은 이유는, 그 임금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직업의 처우를 열악하게 만들고 “너 아니어도 하겠다는 사람이 있다” 내지 “넌 쉽게 취업했으니까 이 정도에 만족하라”는 이유로 경쟁률과 처우를 동시에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럼에도 대졸자, 행정고시, 교수, 기자, 활선전공의 처우가 높은 건, 수요와 공급의 시장원리에 따라서가 아니라 중요하고 어렵고 위험한 직업은 마땅히 그러한 높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당위에 의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노동은 상품이 아니며 노동 가치는 당위에 따라 정해져야 한다. 노동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지면, 노동의 가격을 시장원리에 따라 하락시키는 대신, 경쟁률을 높이는 방식이 선택되어야 한다. 이는 설령 높은 기량을 요구하지 않고 어렵고 힘든 직업이 아니더라도, 최저임금 등의 방식으로 적절한 수준이 당위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는 면에서는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우리사회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노동은 상품이었다. 임금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정해졌다. 그렇게 모든 직업들의 대우는 하나하나 하락했다. 심지어 전문직 노동자들이 받는 대우도 하나씩 무너졌다. 수요 공급에 의존하여 노동의 가치를 정하면, 사회는 더 중요한 직업에 인재를 효과적으로 배치할 수 없어지며, 임금의 경향적 하락이 발생한다.
영화 ‘기생충’은 시종 부유층 가족에게 기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서민 가족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대비시킨다. 그러나 99%가 1%에게 기생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다소 단순한 설명일지 모르나, 극단적 평등을 추구한 일부 사회는 약자가 강자에게 기생했다. 대부분의 불평등한 사회는 강자가 약자에게 기생한다. 기생충이 없이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를 만들려면, 적어도 노동이 상품이 아니며, 노동가격이 수요공급이 아닌 당위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최소한의 공감대는 필요할 것이다.
사회구성원들이 서로에게 기생하지 않는 지점을 찾아 이를 제도적으로 엮어내는 일은 정부의 다양한 방식의 개입과 불개입의 질과 양이 섞어서 나타나는 복잡한 작업이다. 단순히 ‘최저임금을 올리라’ ‘정부는 시장에 개입하지 말라’는 식의 이념대결로 해결될 문제가 아닐 것이다. 환자가 ‘약투여파’와 ‘운동파’와 ‘식이파’의 단순한 이념 대결 따위로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약을 먹여야 낫는다고 약통을 한 입에 털어넣자거나, 물을 많이 먹으면 물중독으로 즉사하니 물은 한 방울도 몸에 나쁘다는 식의 주장만 오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지나치게 냉소적인 시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