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수교 반대운동으로 들끓던 1965년, 그는 서울대를 방문해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36년의 한을 말한다면 나는 360년의 한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는 것 아닌가." 이날 강연을 듣던 대학생들은 오열했다. 이 사람이 지난 16일 별세한 14대 심수관(심수관 3세, 1926~2019.6.16)이다. 심수관은 1598년 12월 정유재란 때 남원에 머물다가 일본으로 납치된 조선 도공 심당길의 후손이다. 심당길이 끌려간 해와 심수관이 한국을 첫 방문한 1965년까지의 기간을 따지면 367년이 된다. 그가 말한 360년의 한은 한 치 부풀림 없이 '그의 기나긴 운명'을 말하는 숫자였다.
십대 때 심수관이 사관학교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얘야, 마당의 저 나무들을 보렴. 나무들이 스스로 원해서 여기 심어져 있는 것은 아니란다. 하지만 심어진 자리에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자라고 있지 않느냐. 우리는 저 나무와 같은 존재다." 아버지는 1964년 임종 직전에 이런 말을 했다. "아들아, 지금부터 34년 뒤인 1998년을 잊지말아라. 그해는 청송심씨 심당길 할아버지가 일본에 온지 딱 4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때까지 살아서 꼭 기념을 해주려무나."
아버지가 말한 그해, 심수관은 한국을 방문해, 남원에서 '조선의 불씨'를 채취해 가고시마현 미야마에 가져온다. 그때 가져온 불씨는 지금도 미야마에서 타오르고 있다. 또 심수관은 가고시마의 수장고에 있던 도자기들을 그해 처음으로 해외 전시한다. 도자기들이 외출한 곳은 한국이었다. 동아일보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400년만의 귀향전'이 그것이다. 또 심당길이 살았던 전북 남원에서는 '귀향제가 열렸다. 그 유언을 따른 아들을 지켜보며 지하에서 아버지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까.
일본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는 심수관이 주인공이다. 작가는 당시 외무대신인 도고 시게노리(조선 도공 박평의의 13대 후손 박무덕(朴茂德)을 취재하러 그의 고향인 미야마에 왔다가 조선 도공 후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시바 료타로는 이 마을에 살던 심수관과 인터뷰를 하게 됐고, 이후 그의 일대기는 소설로 탄생한다. "낮은 능선 위로 하늘은 활짝 트이고, 그 밑에 바다가 숨어있는지 일대는 온통 바닷물의 반사로 눈이 부셨다." 작가가 조선의 산하같다고 말한 가고시마의 미야마(美山)는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정착한 마을이었다.
1597년 전라도 남원 전투에서 승리한 사쓰마의 영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 도공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일본으로 끌고 간다. 가는 길에 큰 풍랑을 만나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43명이었다. 박평의와 심당길은 이때의 생존자였다. 배가 도착한 곳은 시마비라 해변이었다. 그곳에서 도자기를 구울 흙을 찾아나선 그들은 나에시로가와에 당도했는데 그곳이 마치 조선 시골마을같이 아늑해 이곳에 정착하게 된다. 도공들은 한복을 입고 조선말을 쓰고 단군신에게 절하며 조선사람으로 살았으나 메이지유신 때 금지령이 내렸고, 마을 이름도 미야마로 바뀐다. 미야마엔 200여 세대의 주민이 있는데 그 중 절반은 조선 도공의 후예다. 이곳 사쓰마에서 빚어내는 도자기를 사쓰마야키(도자기)라 불리는데, 조선 도예의 진수를 간직하고 있다. 사쓰마야키를 대표하는 것이 심수관요(窯)에서 내놓는 작품들이다.
사쓰마의 영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 도공들을 '사무라이' 급으로 우대했다. 심당길은 조선식 가마를 고집하면서 박평의와 함께 '히바카리 다완'을 만든다. 일본의 '불'만 빌어 솜씨는 조선의 것을 썼다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다. 1998년 남원의 불씨까지 가져왔으니 이젠 온전히 조선 다완이다. 또 도공 심당길의 후손들은 청송 심씨라는 본(本)을 잊지 않고 지금껏 계승하고 있다. 사쓰마야키는 심수관의 할아버지가 1873년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서 대화병 한쌍을 출품해 예술성을 인정받으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심수관은 1989년 한국 명예총영사로 임명됐고 1999년 은관문화훈장을 받는다. 또 2008년엔 남원 명예시민이 되었다. 2004년 가고시마현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때 노무현 당시대통령은 심수관요를 방문하기도 했다.
심당길의 후손은 심당수-심도길-심당관-심당수2세-심당원으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12대에 심수관이란 이름으로 활동한다. 이 분을 심수관1세라 부르는데, 심수관요를 제작해 사쓰마야키를 탄생시킨 사람이며 오스트리아 박람회에 출품한 당사자다. 도쿄법대를 나와 총리비서까지 지낸 그는 일본정부의 작위를 받기도 했으며 프랑스와 미국 박람회에서 수상을 한 기록도 있다. 이후부터는 심수관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는 습명(襲名)제를 유지하고 있다. 심수관2세(일본이름 심 마사히코)는 심수관의 아버지이다. 가고시마현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작고한 심수관(일본이름 오오사코 게이키치)은 3세로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나왔고 원광대에서 문학 명예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심수관 4세(아들, 일본이름 오오사코 가즈테루) 또한 가업을 잇고 있는데, 그의 책상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昨日在苑 本日不在 明日他出. 작일재원 본일부재 명일타출. 어제는 뜨락에 있었는데 오늘은 없구나. 내일은 딴 곳으로 나가겠지. 고향 떠나 400년을 떠돈 이의 끝없는 쓸쓸함을 이보다 더 간절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심수관 3세는 지난 16일 폐암으로 별세했다. 향년92세.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