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사람을 보라
지금 우리는 낯선 길에 서 있다. 일제 치하인 1914년 전남 광주군 부동정 94번지(현재 광주시 불로동 163번지)에서 태어난 한 남자의 등 뒤에서 그의 삶을 따라가 보려 한다. 마오쩌둥이 극찬한 중국공산당의 음악영웅 정율성. 그는 일제 치하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로 항일투쟁을 했던 인물이다. 이 길이 조심스러운 것은 분단의 역사가 만들어낸 어쩔 수 없는 '금기의 공기' 때문이다.
동족간에 벌인 이념의 살육. 그 악몽을 통과한지 66년(휴전을 기준). 시간은 결코 짧지 않지만 전쟁의 적의를 완전히 지우기에는 부족하다. 이 시대 이념갈등은 어쩌면 과거 어느 시간의 질긴 그림자이기도 하다. 아직 기억의 잔상이 서성거리는 나라에서, 이념 저쪽에 제쳐둔 시공간을 소환해 한 인물의 장대한 발자취를 새롭게 새기는 일은 여전히 용기를 필요로 한다. 최근 드라마(MBC '이몽')에까지 등장한 의열단장 김원봉에 대한 논란 또한 맥을 같이 하는 일이다. 정율성은 의열단원이었다.
# 중국과 공산주의를 택한 한국의 천재
우리는 동북쪽의 이웃국가들(중국,러시아,북한)이 모두 공산국가라는 사실에 대해 최근 다소 무감각해진 경향이 있다. 비교적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해진 까닭일 것이다. 이들 국가는 모두 지난 역사 속에 항일과 혁명이라는 두 가지 투쟁 코드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일본 제국주의라는 외세에 '저항'하면서 세력을 키웠고, 그 과정에서 봉건적 전제정치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시스템을 '혁명'하는 길을 걸었다. 전자는 민족(혹은 국가)이고 후자는 이념이다. 민족과 이념을 함께 추구했지만, 양자(兩者)는 가끔 등을 돌리기도 한다.
식민지 조선의 청년인 정율성 또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이념을 택했다. 나라가 없으면 이념도 필요 없었기에, 필사적으로 그는 조선의 독립을 꿈꾸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진가를 발견한 것은 중국공산당이었다. 정율성은 조선민족해방의 간절한 꿈을, 중국공산당의 투쟁 속에 감정이입하듯 심어주었다. 그는 조국의 영웅이 된 것이 아니라, 중국의 별이 되었다.
북한은 연안파 정율성을 외면했고, 우리는 중국공산주의자 정율성을 지워버렸다. 대한민국 광주사람 정율성은, 중국의 기억 속에서만 아스라히 메아리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래도 되는가. 외면 혹은 무지가 능사는 아니다.
# 그날 남북정상의 귀에 들려온 그 노래
2000년 6월13일 오전 10시경. 평양 순안공항에 한국 대통령 전용기가 내렸고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내려왔다. 트랩 밑 활주로에는 또 한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위원장. 두 사람은 활주로 위에 마주 서서 굳게 악수를 한 뒤 북한 인민군 의장대 앞으로 걸어갔다. 이때 북한 군악대가 전주의 신흥고등학교 학생들이 귀에 익은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TV로 이 장면을 지켜보던 그곳 고교생들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북한에서 어떻게 우리 교가를?
이 기이한 비밀 속에는 정율성이 있었다. 그는 항일정신이 투철하던 신흥학교 출신이었다. 이 학교는 식민지 교육에 저항하면서 만주 독립군의 '용진가'에서 빌려와 교가로 편곡해 쓰기도 했다. 정율성은 해방 이후 북한에 갔을 때, '유격대행진곡'을 편곡했다. 이때 참고한 것이 자신의 모교 교가이기도 했고 독립군가이기도 했던 '용진가'였다. 전주와 만주와 평양을 잇는 노래 하나 속에 들어있는, 이 땅의 작곡가 정율성. 그러나 정상회담 당시엔 아무도 그 비밀을 읽어내지 못했다.
# 30억 아시아인에게 중국이 들려준 정율성
1990년 중국 베이징 노동자 체육관에서 제11회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이 나라가 야심차게 준비한 개막식 서곡은 놀랍게도 군가였다. 평화와 화합을 다지는 스포츠행사에 전쟁의 노래가 울려퍼지자, 체육관을 가득 메운 수만명의 중국인들이 목이 쉬도록 큰 소리로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이 노래는 1939년 정율성이 작곡한 '팔로군(八路軍)행진곡'이었다. 1988년 덩샤오핑 주석은 이 노래를 '중국인민해방군가'로 확정한다. 중국 공산당에게는 이 노래가 가장 험난한 시절을 이기게 해준 잊지 못할 엔돌핀이었다. 항일투쟁 시기 중국대륙에서도 오지인 연안(延安)까지 내몰린 그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죽음보다 더한 절망을 견뎌냈다.
일제의 공습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적합해 중국 공산당의 '메카'가 된 연안. 원래 인구 수천의 도시였으나, 젊은 투사들이 몰려와 갑자기 수만 수십만이 북적거린다. 이곳에서 정율성은 1938년초 섬북공학을 졸업하고 3월에 노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 들어가 공부를 한다. 청년들의 도시 연안은 '노래의 도시'였다. 연안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의 양쪽 언덕에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 노래를 불렀다.
정율성은 어느 저녁, 언덕에서 석양이 물드는 연안의 보탑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후 달빛이 어스름하게 비출 무렵 학생들이 합창하며 행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젊은 야심이 노래처럼 몰려들어 가슴 속에 벅차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흥분을 살려내 만든 노래가 그를 일약 유명하게 만든 '연안송(延安頌)'이었다. 정율성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연안은 항일과 혁명의 성지와 같았다. 그런 연안을 많은 중국인에게 알리는 노래가 없었다. 나는 연안정신을 노래로 퍼뜨리고 싶었다."
팔로군 행진곡보다 1년 먼저 나온 이 노래는 당시 마오쩌둥을 놀라게 했다. 연안 한복판에 있는 중앙대례당에서 음악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마오쩌둥이 참석한 것. 정율성은 상해에서 음악공부를 한 여가수 당영매와 함께 '연안송'을 불렀다. 만돌린으로 반주를 하며 "보탑산 봉우리에 노을 불타오르고 연하강 물결 위에 달빛 흐르네"로 시작하는 노래를 부르자, 결 고운 서정에 숨 죽이는 듯 적막이 흘렀다. 노래는 현장의 바로 그 분위기를 물처럼 길어올렸다. 후반부에 "아! 연안"으로 고조되자 청중의 격한 박수소리와 환호가 쏟아졌다.
이후 마오쩌둥은 "연안의 혁명정신을 잘 묘사했다"고 찬사를 보냈고 연안정신을 광활한 중국 전체에 전파하는 전략을 논의했다. 당 중앙선전부에서 정율성의 악보를 받아 가서 인쇄를 해 연안 밖의 대륙 곳곳에까지 뿌렸다.
정율성이 작곡한 '연안송'과 '팔로군 행진곡'은, 그냥 노래가 아니었다. 동북(중국은 만주를 이렇게 부른다)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병사들에겐, 이 두 개의 노래가 위대한 신앙과도 같았다고 한다.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병사들은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일순간 사라진 그들은 적을 향해 용감히 돌격했다. 이런 경험을 했던 중국인들은 정율성을 지금까지도 가슴에 반짝이는 별처럼 우러른다. 그는 사지(死地)를 넘나드는 전사들의 영혼에 선율과 목청을 붙여준 존재였다.
음악가로서 그는 당시 세계적인 인물 한 사람의 죽음 앞에 서기도 한다. 1939년 11월 팔로군 전투에 참여해 의료활동을 하던 캐나다 출신 의사 노먼 베쑨이었다. 수술을 하다가 베인 상처로 감염된 패혈증이 사인(死因)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연안 전체가 슬픔에 잠긴다.
그는 한 명의 외국인 의사가 아니라, 위대한 헌신을 자임한 동지 이상의 존재였다. 세상을 구하는 의사가 되겠다면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뒤, 다시 중국 혁명 전선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후방병원에 머무르지 않고 전투가 치열한 최전방으로 달려가 예전같으면 그냥 죽었을 수많은 병사를 응급수술로 살려냈다.
마오쩌둥은 오열하며 이렇게 말했다. "중국 인민에 대한 그의 헌신은 우리 모두에게 큰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인민에게 진실로 쓸모있는 사람이 되라. 그게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이후 정율성에게 노먼 베쑨의 추도식에 부를 노래를 작곡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연안의 중앙교례당에서 추도식이 있었다.
팔로군 총사령관은 말했다. "우리 중국민족은 영원히 닥터 노먼 베쑨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어 정율성이 작곡한 합창곡이 울려퍼졌다.
"진찰기 변구의 바람/슬픈 소식 실어오니/연하의 강물도 슬픔에 잠기었네/아, 닥터 노먼 베쑨"
슬픔과 뜨거움이 함께 느껴지는 노래를 부르며 조문객들은 나즉히 오열했다. <2편으로 계속>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