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얼빈 의거는 신문사가 가담한 '언론투쟁'이기도 했다
이 항일 언론은 그에게 의거(義擧)를 향한 명분을 각인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세계정세와 역사를 바라보는 폭넓은 관점과 미래에 대한 신념 또한 이 무렵 다져진다. 크라스키노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온 것은 그해 9월이다. 기자 안중근은 이미 거사를 위한 실천방략을 대동공보 신문사와 논의할 참이었다. 신문사는 그에게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지원을 아낌없이 해준다. 하얼빈역에 이토가 온다는 뉴스를 전해주고 총을 구해준 건 기자 이강이었고, 함께 의거작전에 동행한 사람은 역시 같은 신문사에서 회계를 담당했던 우덕순이었다.
대동공보의 역할은 놀랍다. 국난의 시기에 '펜' 대신 총을 쥐고 구적(仇敵)을 척결하려 나선 대담한 '행동언론'이라 할 만하다. 안중근 의거는 '언론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물음에 가장 울림있게 답하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110년 뒤 언론의 눈으로 봐도,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는 저 뜨거운 신문사는 대체 어떤 곳이었을까.
# 최봉준의 해조신문과 최재형의 대동공보
최재형(1858~1920)과 최봉준(1859~1917)은 한 살 차이로 같은 함경도 출신이다. 어린 시절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간 것도 똑같다. 최재형은 얀치혜에서 최봉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큰 부자가 된다. 재형은 러시아군에 군납사업을 하여 돈을 모았으며 얀치혜 군수가 되기도 한다.
봉준은 한국과 시베리아를 오가며 국제 소장사로 떼돈을 벌었다. 상선 준창호(俊昌號)의 선주로 크게 성공한 한인으로 손꼽혔다. 그는 1908년 2월 26일 해조신문(海朝新聞)을 창간한다. 러시아 한인들의 구국운동을 돕는 항일민족신문이었다. 이 신문에 안중근의 '인심결합론'이라는 칼럼이 실린다. 한인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냉철한 글이었다.
해조신문은 러시아 뿐 아니라 배편으로 원산항을 거쳐 당시 경성(서울)과 원산, 인천, 평양의 지국으로 들어갔다. 신문은 곧 일제의 주요 경계대상이 된다. 통감부는 이완용 내각을 압박해 1908년 4월 '신문지법(新聞紙法)'을 개정한다. 해조신문은 국내 판매가 금지됐고 배달된 신문은 압수됐다. 또 최봉준의 무역활동까지 방해를 받았다.
곤경에 빠지자 최봉준이 의병을 비난하는 신문광고까지 내며 일제에 환심을 사려 애를 썼다. 통감부의 눈치를 보는 '상인의 제스처'였다.이렇게 몸부림을 쳤으나 신문은 버틸 수 없었다. 지령 75호, 딱 석달을 내고 5월 26일 해조신문은 폐간되고 만다. 이 신문의 존재는 러시아 일대의 한인들에게 언론의 힘이 나라를 구할 수도 있다는 각성을 심어준 계기가 된다. 해조신문이 폐간된 뒤 최재형을 중심으로 유진율, 차석보, 문창범과 같은 이들이 신문 재간(再刊) 운동을 벌인다.
# 언론사 사장 최재형과 안중근 기자의 인연
유진율은 1908년 5월28일 연해주 군무지사에게 '대동공보' 라는 이름으로 신문을 간행하겠다고 청원을 한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신문 허가가 났다. 1908년 8월15일 첫 발기인총회가 열리고 유진율 등 35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다. 해조신문의 인쇄기와 활자 등 제반 시설을 차석보의 담보로 사들였다. 11월18일 창간호가 나온다. 그러나 재정문제로 신문이 더 이상 간행되지 못했다. 1909년 1월말 신문사 경영진을 새로 꾸렸고 3월3일에야 재간 첫호를 찍었다. 어렵사리 발행된 이 신문의 사장은 최재형이었다. 주필은 러시아 변호사 미하일로프(러시아내 한인 의병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한 인물이기도 하다)였고 발행인은 유진율이었다.
최재형은 1908년에 최초의 독립단체인 '동의회'를 조직한 사람이다. 여기에는 간도관리사 이범윤(고종으로부터 직함을 받았다), 러시아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이 들어있었고, 안중근도 참여했다. 최재형과 안중근은 이때부터 독립활동의 뜻을 이미 나누고 있었다. 대동공보사 사장이 되었을 때, 안중근에게 기자증을 만들어준 것도 그런 인연의 연장이었다.
1909년 단지동맹을 맺은 장소는 최재형의 집이었다. 그는 12명 단지동맹원에게 무기와 숙식을 제공했다. 집 안에 이토를 비롯한 일제 고관 3명의 얼굴을 그려놓고 사격훈련을 하도록 했다. 최재형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1910년 1월29일 안중근이 뤼순법정에서 공방을 벌이고 있을 때,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인 총영사 오토리 후지타로는 외무대신 고무라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고종의 밀사를 자처하는 자가 두 명 등장했다는 정보보고였다. 송선춘(37세 가량)과 조병한(35세 가량)이 그들인데, 경성과 하얼빈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1월17일 도착했으며 현지 한인모임에 등장해 고종칙명을 받들어 뤼순감옥의 안응칠을 구출하러 왔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고종의 도장(어새)가 찍힌 친서를 지니고 있었다. 송선춘은 대한의 관리로 일본과 미국을 다녀온 일이 있고, 일어와 영어에 능통하며 단발에 양복을 입었다는 구체적인 정보도 곁들이고 있다. 오토리 총영사는 이 보고서에서 "1909년 10월 하얼빈 흉변도 궁정으로부터 선동해온 것이다"라고 고종의 역할을 지목한다.
# 고종 밀사 정재관이 대동공보사에 관여?
1910년 1월8일 소네 아라스케 통감이 외무대신 고무라에게 보낸 '흉행자(안중근) 극비보고서'에는 이런 얘기가 등장한다. "1909년 10월10일 유진율이 경영하는 블라디보스토크 대동공보사에 안중근,우덕순, 조도선이 찾아가 잡담을 나눴다고 보고하면서 이토의 하얼빈 방문 소식을 듣고 이들은 "한국을 삼킨 그(이토)가 이제 하얼빈에 오는 것은 반드시 예측할 수 없는 간계를 품고 오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하일로프가 "이번이 좋은 암살기회다. 무기 구입 자금은 동포들의 자금을 갹출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에 안중근이 "내가 실행을 맡겠다"고 자청했다는 것이다.
1909년 12월7일 일본 관동도독부 육군참모장 호시노 긴코가 구라치 데쓰기치 정무국장에게 보낸 정보보고에는 "하얼빈 흉행을 주도한 사람은 정재관"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정재관은 고종의 경호원(시종무관)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어신문을 발행했고 하와이와 블라디보스토크 항일단체의 유력인사이며 1908년 3월 스티븐스 암살사건의 주동자이기도 하다.
우선 스티븐스 사건을 들여다 보면 이렇다. 당시 친일 외교고문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해 "일본의 한국 보호는 한국에 유익하며 백성들은 일본인을 환영한다"는 발언을 하자 교민들이 들끓었다. 북미교민 국민회총회장을 맡은 정재관이 항일단체 연합회를 이끌고 스티븐스가 묵고 있는 호텔에 가서 항의를 하자, 스티븐스는 여전히 "이완용같은 충신과 이토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에 큰 행복이다"라고 주장해 그를 집단 구타한다. 이튿날 오전에 장인환과 전명운이 나서서 그를 사살했다.
# 샌프란시스코 스티븐스 사건을 주도한 정재관
1909년 9월15일에 샌프란시스코의 한국어신문 신한민보는 삽화 하나를 싣는다. 김척(金尺)이라는 한국인이 만주를 먹겠다는 일본을 향해 권총 5발을 쏘는 장면을 그렸다. 천도(天道)와 공법(公法)의 이름으로 처단한다는 글을 붙였다. 이 삽화는 한 일본신문이 한국여성을 사무라이 일본이 농락하는 모욕적 장면을 삽화로 실은 것에 항의하는 의미로 게재한 것이었다. 안중근은 이 삽화를 봤고, 여기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1909년 10월10일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대동공보 신문사를 방문했을 때 주필이 바로 정재관이었다. 그가 갑자기 샌프란시스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긴 까닭은 무엇일까. 고종의 보디가드였던 정재관이 안중근을 만나 이토 저격을 논의하는 상황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상상력이 돋는 지점이지만, 쉽게 얘기할 수 있는 대목은 아니다. 그렇지만 대동공보라는 언론이, 안중근 의거를 현실화시킨 '신념과 전략'의 원천이자 에너지였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 조선족 정춘매 부관장의 오열과 법정 안중근 발언
2019년 4월10일 뤼순법정에서 취재단에게 설명을 하던, 정춘매 뤼순 일본관동법원구지(舊址,옛터)진열관의 부관장(조선족)은 솟아나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잠시 말을 멈췄다. 돌아서서는 가만히 눈물을 훔쳤고, 기자들은 정적 속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정부관장의 오열을 돋운 것은, 사형선고를 받은 날(2010년 2월14일) 안중근이 "사형보다 더 중한 벌은 없느냐"고 물었고, "나는 과연 큰 죄인이다, 다른 죄가 아니라 어질고 약한 대한의 인민된 죄로다"라고 언급한 대목이었다. 죽음을 앞두고도 저토록 결연하고 담담한 태도가 '살아남은 후손'의 비감을 자아냈으리라. 이 모습을 더욱 생생히 전한 것은 1910년 4월6일자 해외언론 '더 그래픽'이었다. 이 매체는 안중근 공판 일주일을 지켜본 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안중근은 기뻐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가 재판을 받는 동안 법정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열변을 토하면서 두려워한 것이 하나 있다면, 혹시라도 이 법정이 오히려 자기를 무죄방면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었다. 그는 이미 순교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10년 3월7일자 싱가포르 '스트레이츠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일본 관선 변호인이 사형선고 다음날(2월15일) 안중근에게 항소여부를 물으면서 모친 조마리아 여사의 말을 전했다. "조상의 명예로운 이름을 더럽히지 마라"라는 말이었다. 안중근은 그 말을 들은 뒤 "판결은 불만족스럽지만 항소를 할 경우 겁쟁이로 비쳐질 수 있으니 숙고하겠다"는 방식으로 항소 포기 의사를 전한다.
안중근이 체포되었을 때, 가장 바쁘게 뛰었던 것은 대동공보였다. 러시아 관할 지역인 하얼빈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여론전을 펼친 것도 이 신문이었다. 최재형 사장은 당시 주필로 승진해있던 미하일로프를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중근은 일본 정부에 넘겨졌고 관동주 뤼순감옥에 갇힌다. 뤼순법정에서 미하일로프는 무료변론을 자청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미즈노 기타로와 가마타 세이지를 관선변호사로 선임한다.
# 나는 진술기회를 얻기위해 이토를 죽였다
대동공보의 전방위적 지원보다 더 큰 '언론'의 힘이 드러났던 건, 안중근의 내면에서였다. 그는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이 재판에서 그의 의거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일제의 조선침략 전반의 부당함과 우리의 독립의지를 천명하고자 하였다. 일종의 '논리투쟁'의 효과적인 무대로 법정을 활용하고 있었다. 2월9일 3차 공판에서 안중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헛되이 살인을 좋아해서 이토를 죽인 것이 아니다. 나 일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다. 이번 거사는 한국 독립전쟁의 하나로 나는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한국을 위해 결행한 것이지 보통의 자객으로 저지른 것이 아니다. 나는 피고인이 아니라 적군에 의해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이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토는 한국과 일본의 역적이다. 특히 이토는 앞서 한국인을 교사하여 민비를 살해하게 했다....이토는 일본 천황에 대해서 역적이라는 것도 들었다. 이제부터 그 사실을 말하겠다."
이 말에 재판정이 술렁거렸고, 마나베 쥬조 재판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재판을 중지시키고 방청객들을 퇴장시킨다. "사회안녕과 질서를 해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일제에겐 금기였던 황실의 거론은 그들을 크게 당황케 했다. 이때 안중근은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이번에 거사를 결행한 이유는 우리 의견을 진술할 기회를 얻기 위한 것이다. 재판공개를 금지한 이상 진술할 필요가 없다."
# 언론인 안중근의 '여론 의거'를 세계가 주목했다
다롄대학 최봉룡교수는 지난 11일 안중근의 법정투쟁과 관련해, "그는 언론인으로서 이 무대의 성격에 대해 잘 알았으며 충분히 활용했다"고 말하면서, "당시 안의사가 집요한 발언을 통해 세계에 밝힌 대한 겨레의 독립의지와 일제침탈의 부당성은 각국 언론을 통해 세계에 알려졌다."고 밝혔다. 강점기 시절 국제사회에 우리 상황을 정확히 알리고자 했던 헤이그밀사 사건은 물론이고 3.1운동 이후의 파리장서 운동 등과 비교할 때 사뭇 강력하게 세계의 이목(耳目)에 다가갔던 '여론(輿論) 의거'로 평가할 수 있다는 얘기다.
대동공보 기자 안중근은, 일제의 심장을 저격한 사건당사자로 그들의 폭압을 고발하는 사상 유례없는 '빅인터뷰'를 이뤄낸 셈이다. 언론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나라의 큰 정신이 되지 못하는 시대에 이르러, 국망기에 한 언론인이 목숨으로 지킨 곧고 굳센 가치의 푯대를 다시 세울 필요가 있지 않은가. <취재지원 한국기자협회·한국언론진흥재단>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