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최고의 독립투사인 건 맞는데…서훈은 좌우(左右)지간 고민되네

2019-04-16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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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의 팩트와 진실]잊혀져 있던 항일투쟁의 큰 별

[영화 '암살'에서 배후인물로 등장하는 김원봉 역을 조승우가 열연했다.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 이 대사를 통해 김원봉은 역사적 존재감을 알렸다. ]

 

[황호택 고문·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 생도 김원봉은 1919년 고국에서 들려오는 3·1 운동 소식에 접하고 벅찬 감격을 느꼈다. 이와 함께 독립만세 함성이 삼천리 강산을 흔들어놓았지만 무기 없는 투쟁으로는 강도 일본을 조선반도에서 축출할 수 없는 무력감을 절감했다. 3·1 운동의 비폭력 노선 대신에 그가 뛰어든 길은 폭력 혁명이었다. 열혈 애국지사를 규합해 적의 고관대작을 암살하고 적의 시설물을 파괴하는 전술이었다.
1919년 11월 9일 일본 경찰이 그 이름만 들어도 전율하고 조선민중이 열광하던 의열단은 중국 지린(吉林)의 한 농가에서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을 중심으로 13명의 서약을 통해 탄생했다. 의열단의 우두머리는 의백(義伯)이라 칭했는데 투표를 통해 22살의 약산 김원봉이 추대되었다.
의열단이 성공을 거둔 첫 번째 거사가 부산경찰서 폭탄 사건이다. 중국인으로 위장한 박재혁이 1920년 9월초 상하이를 떠나 나가사키와 쓰시마(대마도)를 경유해 부산에 닿았다. 그는 부산경찰서장을 찾아가 진기한 고서를 구경시켜주겠다면서 봇짐을 풀어 폭탄을 꺼내 폭발시켰다. 서장은 얼마 안 있다 목숨이 끊어졌고 박재혁도 부상당한 몸으로 단식투쟁을 하다 아흐레 만에 세상을 떴다.
부산경찰서 폭탄사건 두 달 후에는 밀양경찰서가 폭탄세례를 받았다. 1921년 9월 12일에는 조선총독부에 폭탄이 투척돼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1922년 3월 상하이를 방문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한 황포탄 사건, 1924년 일본 황궁 밖 이중교(二重橋) 폭탄 투척, 1925년 베이징의 일제 밀정 김달하 박용만 암살도 모두 의열단원들이 한 일이다. 1926년 12월에는 의열단원 나석주가 식민지 수탈기관인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을 습격했다.
김원봉은 동지들이 계속 희생되는 의열단 활동에 스스로 한계를 인식하고 1926년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해 군사교육을 받았다. 1938년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대장에 취임한다. 의열단의 활동은 멈췄지만 그 정신은 김구 선생이 1931년 설립한 한인애국단으로 이어져 이봉창 윤봉길 의사를 배출했다. 김원봉은 1942년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임정 산하의 광복군에 합류해 제1지대장 겸 부사령관이 됐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부장에 선출됐다.
해방과 함께 귀국한 김원봉은 1948년 4월 19일 김구 김규식의 제안으로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전조선 제정당 대표자 연석회의)에서 사회를 봤다. 회의가 끝난 후 그는 김구 선생과 달리 남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김원봉의 조카는 오마이뉴스 인터뷰(2015년 9월 23일)에서 김원봉이 경찰에 쫓겨 숨어살다가 남북협상이 있던 1948년 초 월북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그는 북한에서 국가검열상 노동상을 지냈으나 1958년 연안파(延安派) 숙청 때 비극적 죽음을 맞았다.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던 시기에는 그의 독립운동을 부각시키기도 어려웠다. 영화 ‘암살’은 그때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김원봉에게 대중성을 부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5년 영화 ‘암살’을 보고나서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잔 바치고 싶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김원봉의 공적은 당대 최고작가의 반열에 올랐던 박태원의 저술을 통해 후세에 전해졌다. 박태원은 1947년 김원봉을 만나 구술을 받고 당시 신문기사와 의열단 동지들의 기록과 증언을 토대로 ‘약산과 의열단’을 썼다
국가보훈처가 약산에 대한 국가유공자 서훈 수여를 검토하면서 여론은 보수와 진보의 양 갈래로 쫙 갈라섰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건립위원장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임정기념관에는 우남 이승만부터 약산 김원봉까지 다 들어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념관에 약산의 독립운동 자료와 행적을 전시하는 것과 서훈은 의미가 또 다르다.

[중국서 독립투쟁 활약 당시의 김원봉.]


[중국서 독립투쟁 활약 당시의 김원봉]

그는 상해 임정에서 좌익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분류됐다. 임정 군무부장을 지낸 독립투사가 일제 악질 경찰출신 노덕술에게 체포돼 모욕을 당한 것도 그의 월북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정정화 ‘장강일기’ p74). 그는 1925년 2월 20일과 21일 동아일보 인터뷰를 통해 사회주의 운동을 통한 민족독립운동이라는 이념적 성향을 드러냈다. 그는 이틀에 걸쳐 연재된 이 인터뷰 기사에서 “민족운동이 곧 사회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며 사회운동자가 민족운동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면서 두 운동의 합치(合致)를 강조했다.
김일성선집 제5권은 의열단에 대해 ‘의병대’ ‘조선독립군’과 한 묶음으로 “이것은 순전히 민족주의적인 군대였으며 지주, 자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군대였다”고 깎아 내린다. 김일성이 만주와 북한 국경에 인접한 보천보 경찰주재소를 습격한 사건을 북한은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지만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등 김원봉의 굵직굵직한 행적에 비하면 견줄 바가 되지 못한다.
보훈처는 독립기념관에서 김원봉의 업적을 주제로 학술토론회를 열었고 여론을 수렴 중이라고 한다. 문재인 정부의 보훈처는  ‘독립유공자 서훈공적 심사기준’을 ‘사회주의자라도 북한 정권 수립에 가담하지 않았으면 독립유공자로 본다’고 바꾸어 사회주의 활동을 한 사람에게도 서훈을 줬다. 그러나 김원봉은 월북해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고 김일성 밑에서 남한의 장관에 해당하는 자리를 두번이나 했다. 김원봉 한 사람을 위해 극심한 국론의 분열을 겪으며 독립운동가 선정 기준을 다시 바꾸자면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김원봉에 대한 서훈 수여는 통일 이후에 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나 그때까지 미룰 수 없는 것이라면 북핵 문제가 해결되고 남북이 좀더 화해의 길로 나아갈 때까지라도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되면 김원봉의 독립운동 업적과 함께 김일성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그의 삶을 평가하는 인식이 확산될 것이다. 독립운동의 큰 별 김원봉의 공적은 서훈이 없어도 그 자체만으로 빛난다. <논설고문·서울시립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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