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이 가장 가슴 깊숙이 와닿았다. 그가 103세 인 걸 금세 잊었다. 자신의 새로운 작품과 앞으로 그리고 싶은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고, 눈빛은 빛났다.
“그림 몇 점 내놓고 전시회 한다고 불러서 미안합니다.” 10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 ‘여기, 지금(Here and Now)'를 시작한 김병기 화백이 쑥스럽게 첫 인사를 전했다. 마침 4월 10일은 김 화백의 생일이었다.
특히나 자신의 작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활기가 넘쳤다. 최근 3년간 그린 신작들과 구작들 20여점이 전시 돼 있는 ‘여기, 지금’은 2016년 봄에 100세를 기념해 열었던 ‘백세청풍(百世淸風)·바람이 일어나다’전 이후 3년 만에 여는 개인전이다.
2019년에 완성한 ‘산의 동쪽-서사시’ 작품 앞에 선 김병기 화백은 “아침인데 황혼같이 느껴져 노란색으로 칠했다. 밑에 있는 빨간색, 검은색 도형은 그림자다. 검은색 사각형이 외로워 보여 오른쪽 밑에 빨간 세모를 그렸는데, 옆의 삼각형과 이어지더라. 내가 마스킹 테이프를 잘 쓴다. 세로로 된 하얀 여백은 소나무와 감나무다. 기하학적인 형태의 그림이다”라고 상세하게 설명했다.
신작들은 이전 작품들에 비해 더욱 밝아졌다. 이에 대해 김병기 화백은 “색에 대한 욕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아주 다채로운 색의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오방색(황·청·백·적·흑)은 아름답다”며 “내가 지금 몇 살인데 ‘앞으로’라고 하면 죄송한 말씀이긴 하다”라고 웃었다.
김병기 화백의 창작에 대한 열정은 그 어떤 작가보다 뜨겁다. 이정용 가나아트 대표이사는 “김병기 선생님께서 3년 전 전시회 때 앞으로 그리고 싶은 작품들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들려주셨다. 놀라웠다”고 회상했다. 김병기 화백은 “작품을 완성하면 짜릿해지고 눈물이 핑 돈다. 눈물이 난다는 것은 작품이 됐다는 이야기다”고 설명했다.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난 김병기 화백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주요한 족적을 남긴 원로화가다. ‘추상화가 1세대’인 김병기 화백은 “추상화가처럼 작품 활동을 했지만 사실 나는 체질적으로 형상성을 떠날 수 없었다. 형상과 비형상은 동전의 앞뒷면에 불과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추상미술에는 형상성과 비시간적이지만 존재하는 인간의 정신이나 감정, 관념들이 공존한다.
잠시 숨을 고른 김병기 화백은 “추상을 넘어 오브제를 넘어 원초적인 수공업적인 상태에서 선에 도달했다. 추상을 넘어섰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라며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시대라고들 한다. 나는 나대로 동양성을 가지고 포스트모더니즘을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김 화백은 그림을 자신이 좋아하는 스포츠에 빗대 표현하기도 했다. 김형국 가나문화재단 이사장은 “김병기 화백께서 ‘축구에서 계산된 플레이만 하면 골이 안 나온다고 하더라. 그걸 넘어서야 한순간에 골이 터진다. 그림 또한 그렇다. 계산을 넘어선 경지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앞으로도 김병기 화백의 환상적인 골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