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30년 무기력감 청산할 '연호 대전환기' …레이와시대 여는 아베가 불안불안한 까닭

2019-04-11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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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平成)' 시대 탈출, 개헌ㆍ7월선거ㆍ올림픽의 함수

 

이수완 논설위원[남궁진웅 기자, timeid@ajunews.com]


오는 4월 30일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퇴위와 함께 '헤이세이(平成)' 시대는 저물고 '레이와(令和)시대가 열린다.  ‘개원(改元·연호가 바뀜)’의 뜨거운 열기 속에 지금 일본은 혹독한 겨울과 같았던 지난 30년에 대한 추억을 되새기고 있다. 또 '기대반 우려반'의 표정으로 다가오는 새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지난달 제이팝(J-Pop)의 여왕 아무로 나미에(安室奈美惠·42)에 이어 일본 야구가 낳은 불세출의 영웅 스즈키 이치로(鈴木 一朗·46)가 은퇴를 선언하자, 많은 일본 국민들은 이들의 퇴장을 '헤이세이' 시대가 저물고 있는 상징으로 받아들이며 안타까워했다.

이치로는 18세이던 1992년 오릭스 블루웨이브(현 오릭스 버펄로스)에 입단해 프로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때는 헤이세이 시대(1989~2019)가 막 시작된 시점으로, 일본 경제의 자산 버블이 붕괴되기 시작하고 '잃어버린 20년'이라는 금융위기와 경기침체기로 돌입한다. 1989년 1월 히로히토 일왕의 서거로 64년간의 쇼와(昭和)시대가 막을 내렸지만, 그해 가을만 해도 소니가 할리우드의 콜럼비아픽처스를 인수하고 미쓰비시가 뉴욕의 록펠러 센터를 사들이는 등 일본은 세계 경제에서 부러움과 감탄의 대상이었다. 이 두 개의 메가딜(mega deal)은 당시 엔화 가치가 급격히 치솟아 가능했지만 태평양전쟁의 패전을 딛고 일어선 일본의 황금시대를 상징했고, 미국의 자존심은 큰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수출주도형 국가인 일본의 제조기업은 엔고 영향으로 경쟁력을 크게 잃고 불황을 맞는다. 1990년대 경기회복을 위해 대대적인 금리인하 정책을 펴며 유동성을 증가시키려 했지만 시중에 풀린 돈은 정책 목적과 달리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가며 자산 버블만 키우게 된다. 뒤늦게 금리를 인상해 투기를 막으려 했지만 부동산을 사들였던 개인과 기업은 줄지어 파산했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며 잃어버린 10년이 20년이 되었고, 강경 우파인 아베 신조 총리가 집권하면서 저성장 시대 종식을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다시 말하면 '헤이세이'는 소니나 캐논, 파나소닉 등 세계를 주무르던 일본 기업들의 쇠퇴기였다. 또한 장기간의  경기 침체에 대한 초강력 처방전인 '아베노믹스'의 시대였다. 아베노믹스가 일본을 장기 불황의 터널에서 벗어나게 만든 구세주로 평가되면서, 2012년 집권한 아베 총리는 지난해 9월 집권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3연임에 성공했고 전후 최장수 총리 재임 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다.

‘평화를 이룬다’는 뜻의 헤이세이 연호가 사용됐지만, 일본에게 이 기간은 2차대전이 발발한 히로히토 쇼와(昭和)시대 못지않은 격동기였다. 장기 불황의 늪에 빠진 것은 물론 2011년 동일본대지진, 후쿠시마 원전사고, 옴 진리교 테러 등 재난과 대형 사건이 적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도 엄청난 소용돌이의 진통을 겪으면서 30년 동안 5개 당에서 17명의 총리가 나왔다. 2001년부터 5년간 총리를 지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와 아베를 제외하고는 다른 총리들의 임기는 겨우 1년 정도에 불과했다. 전 현직 총리 등 여당 실세들이 미공개 주식을 받아 일본 전체를 뒤흔든 '리쿠르트 스캔들', 그리고 거대 운송회사(사가와 익스페레스)의 정치권에 대한 불법 로비 등 대형 정치 스캔들이 잇달아 터지면서, 헤이세이 초기 일본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혐오증은 커진다. 그리고 일본 유권자들은 서구의 많은 나라들처럼 2개의 주요 정당이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는 형태의 정치 시스템을 열망하게 된다.

1996년에 결성된 민주당은 2009년 일본 총선에서 54년이나 이어온 자민당의 장기지배체제를 걷어내고 일본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룩한다. 월 2만6000엔의 아동수당지급, 공립고등학교의 무상교육, 월 7만엔의 최저연금 보장, 75세이상 고령자에 대한 무상의료 등 민주당이 내놓은 '포퓰리즘' 공약에 장기불황에 시달리던 서민들은 열광했다. 민주당 정부는 무상복지로 가계의 가처분소득을 늘려 소비를 확대, 경기를 회복 시키고 특히 ‘내수주도형성장’을 추진했으나, 이러한 공언(公言)은 신기루가 되고 만다. 결국 재원조달의 한계에다 수출 대기업들의 실적 악화로 인해 일본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의 수렁에 빠진다. 불과 39개월 만에 민주당 정권은 붕괴한다. 2012년 총선에서 정권을 되찾은 자민당의 아베 총리는 양적완화, 규제개혁, 법인세 인하 등 친기업적인 아베노믹스를 밀어붙이면서 일자리가 크게 늘고 침체된 경제가 활력을 되찾는 모습이다. 완전 고용에 가까운 수준에 도달한 일본은 한국을 찾아와 젊은 인재를 구할 정도이다. 최근 아베는 민주당 정권 시절의 일본은 '악몽'이었다고 조롱했다.

아베노믹스의 성과  

이제 일본의 많은 기업들이 경쟁력을 회복하면서 국가 경제 전반에 활력이 살아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베 정권이 큰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아베노믹스에 대한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그동안 마이너스 금리, 엔화 약세, 주가 부양 등 인위적인 부양책을 통해 경제는 살아났지만 일본 경제의 고질병인 디플레이션(물가하락)의 악몽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장기간 유지하고 있는 마이너스 금리 정책은 금융기관의 수익을 악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물가 목표인 2% 달성이 아직도 요원한 상태에서 통화정책에 변화를 주기도 어려운 상태이다. 지난 5년 간 대규모 금융완화를 통해 아베노믹스를 견인하고 있는 일본은행은 현재 국가 전체 GDP보다 큰 규모인 550조엔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은행이 너무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자산을 보유하면서 현재 자산 시장은 크게 왜곡된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산 매입을 중단하고 금리 정상화를 위해 미세한 조정이라도 들어갈 경우 세계 금융시장이 받는 충격은 엄청나기 때문에 출구 전략도 쉽게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기업들도 수익이 나아졌지만 과거 불황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인지 미래산업에 공격적인 투자를 주저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기업의 투자 등을 이끌어내는 환경을 만들 것인가가 일본의 고민거리이다.

최근 일본의 경기 회복세는 주춤하고 있다. 일본의 2018년도(2018년 4월~2019년 3월) 실질 성장률은 0.6%, 2019년도 성장률 역시 0.6% 정도로  예측되고 있다. 강진과 태풍과 같은 자연 재해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미·중 간의 무역 전쟁 여파로 아시아 공급망이 약화되었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는 그동안 금융 완화와 주가 부양 등으로 이룩한 아베노믹스가 외부 변수에 얼마나 취약한 모습인지를 나타내고 있다. 올해 10월 예정된 소비세 인상(10%)에 대한 후폭풍도 걱정이다. 지난 2014년 소비세가 5%에서 8%로 올랐을 때 일본 경제성장은 0.4%를 기록하며 크게 위축됐다. 만약 트럼프 행정부가 일본과의 무역 적자 해소를 위해 환율 문제까지 본격적으로 들고 나오면 경제 전반에 대한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엔화 약세로 급격히 늘어난 외국인 관광객도 엔화가 강세로 반전될 경우 감소가 불가피하다.
최대 과제는 고령화와 저출산   

무엇보다도 일본 경제의 최대 문제는 고령화와 저출산이다. 일본의 인구는 2009년 1억2700만명의 정점을 찍은 후 계속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지난 해 일본에서 태어난 아이는 92만명으로 3년 연속 100만명 이하이다. 1000년 후면 일본인이 완전히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으로 전망한 '어린이 인구시계' (2012년 도후쿠 대학 연구진 발표)는 저출산의 심각성을 일본 사회에 알렸다. 이후 아베 총리는 일본의 인구 감소를 1억명에서 멈추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양육과 교육에 드는 과비용, 그리고 결혼과 섹스에 흥미를 잃고 있는 일본 젊은층의 사고방식을 보면 갈수록 우리나라도 일본을 꼭 빼닮아가는 모습이다. 일본인의 평균수명은 세계에서 높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고령화가 세계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노인 복지를 위한 사회적 비용도 엄청나다. 일본의 베이붐세대인 '단카이세대'(1947~1949년생)가 모두 75세가 되는 2025년에는 치매환자가 730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일본 후생노동성 조사결과도 있다. 이는 일본 65세 이상 인구 5명 중 1명꼴이다. 1995년과 2010년 세계 최초로 고령사회(65세 인구가 전체 14%를 초과하는 사회) 초고령화사회 (65세 이상 인구비율 21%)에 진입한 일본은 노인을 부양하기 위한 국민의 세부담과 정부 빚이 눈덩이처럼 늘어나면서, 재정건전성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투자의 귀재 짐 로저스 회장은 최근 일본에서 시판된 자신의 책 '돈의 흐름으로 읽는 일본과 세계의 미래'에서 "지금 내가 만약 열 살 일본인이라면 즉시 일본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것을 생각할 것”이라며 일본의 심각한 저출산, 어마어마한 국가 부채, 인구가 감소하는데도 이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정책 등을 비판했다.

'일본에 대한 긍지'를 강조하는 아베 총리는 새 연호 선정과 발표 과정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기회로 이용하고 있다. 아베 내각은 역대 248번째 연호인 레이와를 만들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 고전이 아닌 일본 고전 '만요수(萬葉集)에서 따왔다. 아베 총리는 지난 1일 기자회견에서 "레이와에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마음을 맞대면 문화가 태어나고 자란다는 뜻이 담겨있다"고 했다. 또 "극한 추위 뒤 봄이 오는 것을 알리고, 화사하게 피어나는 매화꽃처럼 일본인들이 내일을 향한 희망과 함께 큰 꽃을 피우자"고 의미를 부여했다.

연호가 발표되던 날 많은 일본 국민들은 TV 앞에 모여 환호성을 올리며 '레이와 시대'에 대한 기대감을 표출했다. 나루히토(德仁) 왕세자의 신 일왕 즉위일인 5월 1일과 그 전후로 연결된 10일의 황금 연휴 동안 일본 산업계는 여행업, 외식업을 중심으로 특수(特需)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 요소는 만만치 않다. 전통적으로 연호가 바뀌면 시대의 혼(魂)도 변하곤 했다. 쇼와 시대 회사에서 밤낮으로 억척같이 일하던 젊은이들의 모습은 헤이세이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교토 대학의 낸시 스노우 교수는 자신의 제자들을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헤이세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앞으로 쇼와 시대만큼 부유하게 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며 "세계를 누비고자 했던 이전 세대 젊은이들만큼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게이오 대학의 야수노리 손 정치학 교수는 "고령화는 심화되고, 인구는 계속 줄며 소득 격차는 커지는 가운데 향후 30년은 이전 30년보다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절박감은 없어 보인다"고 덧붙였다. 수십년간 혹독한 겨울을 거치면서, 많은 일본인들은 무기력과 좌절감에 빠진 채 쇼와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다. 또 새로운 연호의 시작이 일본에게 새로운 시대 정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전환점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일본인들도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은 전후 일본을 세계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시켰다.  다가오는 2020년 도쿄 올림픽이 또 다른 도약의 계기를 제공할 것 이라는 기대감도 있다.    


헌법개정과 군국주의 회귀 움직임

안타깝게도, 아베 정권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헌법개정을 통해 일본을 '전범국'에서 '전쟁이 가능한 보통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한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도쿄 올림픽이 열리는 2020년에 새 헌법 시행 목표를 내세우고 있는 아베에겐 오는 7월 예정된 참의원 선거는 최대 관문이다. 현재 중·참의원에서 연립 여당이 3분의 2 이상을 확보하고 있다. 만약 이번 선거에서 여당이 개헌선 확보에 실패하면, 아베 총리는 레임덕에 빠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아베가 개헌을 통해 군국주의로 회귀하는 움직임은 한·일 관계는 물론 아시아 평화와 안정에 대한 최대 위협이다. 올해 한·일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배경에는 아베가 한·일 현안을 놓고 일을 키워 내부 결집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다. 우리 군 함정과 일본 초계기 레이더 추적 논란,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둘러싼 공방, 독도를 일본 땅으로 주입시키는 일본 초등학교 검정교과서 공개에 따른 설전 등 양국간 외교적인 갈등은 위험한 수준에 달했다. 대법원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책임 인정 판결 이후 일본 정부는 경제 보복 가능성까지 공공연히 언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산업계와 경제계의 위기감도 고조되고 있지만, 한·일 관계 정상화를 위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병종 숙명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일본 경제는 개선되고 있고 한국경제는 악화되고 있다"며 "한·일관계가 계속 악화되면 손해가 더 큰 쪽은 한국이다"고 말했다. 또 "(일본이) 눈에 보이지 않는 비관세 장벽을 높이면 한국 수출은 더욱 타격을 받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문재인 정부가 "친일 청산을 외치면 국내 정치적으로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국제관계에서는 피해를 입게 된다"고 말했다.

5월 1일부터 사용되는 새로운 연호 '레이와'에는 내일을 향한 희망과 함께 꽃을 피워 나가자는 일본인들의 염원을 담았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강 대 강 대응을 지양하고 아시아 평화와 경제 협력의 길로 나서야 할 적기이다. 한국도 보다 적극적으로 외교라인을 가동시켜 미래를 향한 대일관계 구축에 힘쓸 때이다.
 
 

 

방위대 졸업식에서 훈시하는 아베 총리 (도쿄 교도=연합뉴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3월 17일 가나가와(神奈川)현 요코스카(橫須賀)시에 있는 방위대학교 졸업식에서 훈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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