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객들이 결혼식을 마치고 여유롭게 떠날 수 있도록 출발시간을 밤 시간대로 조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몰디브 취항을 앞두고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제안한 내용이다. 조 회장은 경영과 관련한 전 과정을 꿰뚫고 있는 '디테일에 강한 경영자'였다.
가업을 물려받았지만 자신만의 경영철학을 구축하며 기업을 이끌어왔다. '기업은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자격을 갖춰 가꿔나가는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아무리 2세라도 자격이 없으면 기업을 이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은 전문경영인 시대로서 실무를 모르고는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다"며 "업무 내용을 정확히 파악한 후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경영자의 기본조건이라고 본다"고 말한다.
특히 항공사는 여타 제조업과는 달리 전문적인 경영 능력 없이 권위만을 가지고는 경영권을 행사할 수 없는 특수 업종이라는 것이다.
조 회장은 기체에 대해 항공 전문용어로 막힘없이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지식을 갖춘 실무형 리더였다. 취항지를 결정할 때 직접 나서기도 했다. 미국 취항지를 선정할 때 허름한 모텔에서 자고 패스트푸드를 먹으면서 18일간 6000마일(9600km)을 손수 운전해 미국 곳곳을 살핀 일화는 업계에서 유명하다. 40여 년간 전 세계를 누볐지만 그는 작은 도시 한 곳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베트남 하롱베이, 터키 이스탄불은 조 회장이 직접 발로 뛰어 하늘 길을 개척한 곳으로 꼽힌다.
조 회장은 최고경영자는 비전을 제시해 기업을 이끌어야 한다며 시장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해왔다. 2003년 2월 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취임 3개월 만에 에어버스의 항공기인 A380을 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A380은 좌석 수 500석 이상의 초대형 항공기다. 당시 미국의 9·11테러 사태 여파로 어수선한 상황이었고, 항공 업황도 좋지 않았다. 주변에서 반대했지만, 그는 곧 대형 항공기 시대가 열릴 것이라며 밀어 붙였다.
실제로 5년 후인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기가 점차 회복되면서 그의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대한항공은 선발주한 덕분에 저렴한 가격에 최신 항공기를 도입할 수 있었다.
조 회장은 “미국식보다는 독일식 경영을 하라”, “시스템에서 움직이고 시스템으로 움직여라” 등의 말도 자주 했다. 똑같은 인력과 보유자재라도 최대한 활용해서 한진그룹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것이며, 어느 한 개인에 의해 업무가 좌지우지 되지 않도록 탄탄한 기업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또한 “쉼 없는 전진만이 그 격차를 줄이는 첩경이며 조금이라도 자만하거나 방심하면 언제든지 도태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