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내놓은 집이 빠지지 않아 고생하던 차에 우연히 발견한 전단지 속 번호를 누른 것이 시작이었다. 전단지엔 '매매 전문부동산'이란 제목과 함께 '집이 안 팔리시나요? 매매 전문부동산에서 한 달 안에 팔아드립니다. 인터넷·신문·전단지 총 동원하며 광고비는 받지 않습니다. 믿고 전화주세요'라는 문구가 씌어 있었다.
지난해 9·13 부동산 대책 이후 매매거래가 끊기다시피 하면서, 광고비를 받지 않고 인터넷·신문·전단지 등을 총 동원해 집을 팔아주겠다는 중개업소가 나오고 있다. 이런 업소 가운데 일부는 광고료를 안 받는 대신 매수자가 내놓은 금액보다 높은 가격에 부동산을 팔고 차액을 수수료로 챙기겠다는 제안을 해 고객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19일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S중개업소 관계자는 "광고비는 따로 받지 않는다. 아파트뿐 아니라 다세대, 오피스텔, 근생(근린생활시설) 모두 팔아주겠다"면서 "요율대로 수수료를 받을 수도 있지만, 원하는 금액을 알려주면 그 만큼 받아드리고 더 높은 가격에 팔 경우 차액을 복비로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순가계약은 부동산 시세에 대한 정보가 지금과 같이 공개되기 전까지 활개를 쳤다. 아직도 토지, 빌라(연립), 단독주택, 다가구주택 등 시세가 불투명한 부동산 거래에선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 들어선 9·13 부동산 대책의 영향으로 주택 거래가 끊기고 매도인들이 조급한 상황에 놓이는 경우가 많아, 무료광고를 앞세워 순가계약을 요구하는 중개업자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현재 공인중개사법은 순가계약 금지를 명시하고 있지 않지만, 수수료 초과 징수를 금지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순가계약을 금지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 B씨는 "우리나라는 순가계약이 투기를 조장하고 소비자들의 신뢰를 떨어뜨린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를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서 "그런데도 중개업자들은 고객들이 공인중개사법을 잘 모른다는 점을 악용해 이 같은 계약방식을 많이 채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 공정경제과 관계자는 "순가계약을 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정상적인 중개업자가 아닌 경우가 많다. 소위 '컨설팅 업체'라 불리는 곳들이 그렇게 한다"면서 "지인에 공인중개업자 면허를 빌려 불법으로 중개하고 시세를 조작하는 등 부동산 거래질서를 교란시킨다"고 지적했다.
순가계약의 가장 큰 피해자는 매수인이다. 매도인과 중개업자가 담합해 조작한 시세대로 물건을 매입하게 되므로 소위 '바가지'를 쓰게 돼서다.
때에 따라서는 중개업자가 매수인뿐 아니라 매도인까지 속여 매도인이 피해를 입기도 한다. 물건의 시세 파악이 힘들다는 점을 악용해 집주인에게 시세를 실제보다 낮게 일러주는 경우다. 예컨대 중개업자가 실제 시세 1억2000만원인 집을 내놓은 매도자에게 "이 집의 시세는 1억원이나 1억2000만원에 팔아주겠으니 차액 2000만원 가운데 1000만원을 복비 개념으로 챙기게 해달라"고 하면, 매도인은 이득을 보려다 도리어 1000만원 가량 손해를 입게 된다.
중개업자가 광고를 대신 해주면서 추가 비용을 챙기는 것이 전부 불법인 것은 아니다. B씨는 "중개 수수료와 별개로 컨설팅 비용을 받을 수 있다"면서 "다만 컨설팅 비용을 받기 위해선 부동산 중개와 별개로 컨설팅 계약서를 써야 하고, 실제로 컨설팅을 하고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서류 등을 매도자 등에 주기적으로 보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컨설팅 계약 없이 중개 수수료를 과다하게 요구·징수했다 적발된 중개업자는 공인중개사법에 따라 6개월 이내 업무정지 또는 등록취소 등 행정처분과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 등 처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중개업자가 처벌을 받긴 어려운 실정이다. 엄정숙 변호사는 "중개업자가 정해진 요율보다 수수료를 많이 가져갔을 때 매도인 측에서 반환을 요구할 순 있으나, 순가계약의 경우 매도인과 중개업자가 입을 맞춘 상황이기에 매도인이 문제제기를 할 이유가 없다"며 "매수자도 이를 걸고 넘어지긴 어렵다. 매매가격이란 게 어쨌든 매도인과 매수인의 합의 하에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개업자와 담합한 매도인의 경우도 처벌받을 이유가 없다는 설명이다. 서울시 공정경제과 관계자는 "본인이 인정한 금액대로 팔고 양도소득세를 냈다면 적법하다"면서 "단지 과도하게 중개 수수료만 많이 준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서울시는 이 같은 부정을 막기 위해 공공기관(건축물대장, 부동산 실거래가, 생활편의시설정보 등)과 금융기관(담보대출데이터 등)이 각각 보유한 부동산 관련 데이터를 융합해 '소형 공동주택 매매시세 데이터'를 개발 중이다. 오는 6월 빅데이터 캠퍼스 등을 통해 데이터를 전면 혹은 일부 개방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