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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19/03/07/20190307100629118757.jpg)
[문화재청]
‘강진 백운동 원림’은 월출산 옥판봉의 남쪽 경사지 아래쪽으로 백운동 원림의 본가인 강진군 성전면 백연당에서 북쪽으로 11㎞ 떨어진 곳에 있다. 고려 시대 백운암이라는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계곡 옆에 ‘백운동’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남아 있어 ’백운동‘이라 불린다.
강진 백운동 원림의 내정(안뜰)에는 시냇물을 끌어 마당을 돌아나가는 ‘유상곡수’의 유구가 남아 있고, 화계(꽃계단)에는 선비의 덕목을 담은 소나무, 대나무, 연, 매화, 국화, 난초가 자라는 등 조선 최고의 별서 원림 중 하나다.
이 원림을 조영한 사람은 조선 시대 이담로(1627~1701)로 호는 백운동은이다. 그는 손자 이언길에게 유언으로 ‘평천장’의 경계를 남겨 후손들에게 전하고 이 원림이 지금까지 보존되게 했다. 별장으로 사용하던 백운동 원림은 이후 증손자 이의권(1704~1759)이 가족과 함께 살며 주거형 별서로 변모했고, 이덕휘(1759~1828)와 이시헌(1803~1860) 등 여러 후손들의 손을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된 것으로 문화재청은 추정하고 있다. 평천장은 당나라 이덕유가 ‘평천산거계자손기’에 “후대에 이 평천을 파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며, 나무 한그루와 돌 하나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훌륭한 자제가 아디다”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했다.
‘강진 백운동 원림’은 후손들과 명사들이 남긴 문학작품의 무대로도 등장한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백운동에 묵으며 그 경치에 반해 제자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12곳의 아름다운 경승을 칭송하는 시를 남겼다. ‘백운첩’에 담긴 이 그림과 시는 지금의 모습과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다산의 제자이기도 한 이시헌은 선대의 문집, 행록(언행을 기록한 글)과 필묵을 ‘백운세수첩’으로 묶었고 조선후기 문인 김창흡, 김창집, 신명규, 임영 등이 남긴 다양한 백운동 시문들과 함께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조선 시대 선비들이 문화를 교류하며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다산 정약용, 초의선사, 이시헌 등이 차를 만들고 전해주며 즐겨온 기록이 있는 등 우리나라 차 문화의 산실이 되어온 가치까지 더하고 있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