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근의 차이나 무비⑮] 암울한 홍콩에 대한 성찰을 담은 ‘아비정전’

2019-01-0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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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영화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왕가위 감독 작품

존재론적 관점, 세기말 몽환적 분위기로 담아내

주인공 아비가 맘보춤을 추고 있는 ‘아비정전’의 유명한 한 장면. [사진=바이두]


1960년 홍콩은 암울했다. 존재의 근원을 상실한 도시는 방황했다. 공산화된 대륙과 저 멀리 떨어진 섬나라 영국, 대만(臺灣)으로 건너간 국민당은 사실 그 누구도 더는 자신의 어머니가 될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분명한 ‘상황주의’의 도래였다. 1960년 스무 살 남짓한 젊은 청년 아비(阿飛·장국영 분)는 불안했다. 이민의 도시 상하이(上海)에서 다시 홍콩으로 이주한 이민자, 디아스포라의 ‘재디아스포라’가 그의 신분이었다. 존재의 근원, 생모를 잃은 채 계모와 더불어 살아가는, 그러나 물적으로는 부유하기 그지없는 이 젊은 청년의 불안은 그런 의미에서 홍콩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다.
1960년 홍콩, 부유한 집의 방탕한 청년 아비. 그는 한 번도 생모를 만나 본 적 없이 계모의 손에 자라났다. 여성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냉혹한 사람, 아비. 그러나 축구경기장 매표원인 쑤리전(蘇麗珍·장만옥 분)을 만나 순식간에 사랑에 빠지고 동거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오래되지 않아 쑤리전과 헤어진 그는 다시 댄스 걸 루루(유가령 분)를 만난다. 아비와 헤어진 쑤리전은 어떤 경찰(유덕화 분)을 알게 되고 밤거리에서 담담한 대화를 이어간다.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직전의 1분간. 너와 나는 함께였다. 나는 이 1분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왜냐하면 이미 지나갔으니까.”

존재의 근원, 그 심연을 찾고 싶어하는 청년의 고백은 처절하다. 붙잡을 수 없는, 그러나 붙잡아야만 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는 자신이라는 존재를 스스로 구성해 가려 한다. 쑤리전, 루루와의 동거.

하지만 그토록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그녀들과의 ‘1분’은 그에게 아무런 역사가 되지 못한다. ‘1분’ 이전의, ‘1년’ 이전의, ‘10년’ 이전의 역사를 복원해야만 그 ‘1분’이 역사로서 유의미한 시간이 된다.

생모를 찾고 싶은 갈망을 버릴 수 없는 아비는 계모와 한바탕 다툼 끝에 소동을 벌인다. 생모를 찾고야 말겠다는 결심으로 쑤리전도 루루도 버린 채 혼자 필리핀으로 떠난다. 남몰래 쑤리전을 사랑해 온 경찰은 아비와 쑤리전의 결별을 목도한 뒤 직업을 바꿔 배를 타기로 결심한다.

겨우 생모를 만나는 아비, 그러나 생모는 그를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 필리핀에서 아비는 우연히 선원이 된 경찰을 만나게 되고 둘은 홍콩에서의 경험을 숨긴다. 거짓 여권이 필요했으나, 돈이 없었던 그는 폭력 조직과 한바탕 격투를 벌이게 되고 중상을 입는다.

기차를 타고 도주하던 그는 결국 총을 맞고 숨을 거둔다. 아비를 찾아 필리핀으로 향하는 루루, 경찰에게 전화하지만 통화를 할 수 없는 쑤리전, 기차 안에서 아비의 죽음을 지키는 경찰의 운명이 서로 엇갈린다.

‘발 없는 새’는 정주하지 못할 것이다. 쉼 없이 날아야만 할 것이다. 존재의 근원을 보상받지 못하는 젊은이는 그 절대적인 시간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공간을 상대화한다. 비록 상하이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으나, 근원에 대한 갈망은 그를 필리핀으로 인도한다.

상하이, 홍콩,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공간 이동, 거리의 경찰이 홍콩을 버리고 택하는 필리핀 행, 쑤리전의 홍콩과 마카오 왕복, 홍콩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아비의 계모. 공간이란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지만, 어느 곳에 있든 우리의 시간은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공간을 버티지 못한다면 그로부터 도피를 선택할 수 있지만, 자신을 규정하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면 결국 그 근원을 찾아내야만 한다. 왕가위(王家衛) 감독의 시간이란, 그렇게 죽음을 통해서만 끝낼 수 있는 존재론적 고민의 문제를 형상화한다.

홍콩영화가 누아르에 의해 검게 물들어가고 있을 무렵, 그 물결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상황에서 1998년 ‘열혈남아(旺角卡門)’로 영화에 입문했으나, 오히려 홍콩영화의 경향을 완전히 바꿔 놓은 감독, 왕가위.

그는 홍콩영화의 새로운 분위기를 창조하면서 당대 최고의 스타일리스트가 됐다. 그럼에도 모성의 부재를 견디지 못한 젊은이의 안타까운 삶과 죽음을 그린 작품 ‘아비정전’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 평가는 자칫 그를 대중에게서 영원히 결별하게 하는 계기가 될 뻔했다.
 

영화 '아비정전' 포스터. [사진=바이두]


“저주받은 걸작”이라고까지 일컬어진 이 영화가 다시 발견된 건 감독이 1994년 ‘중경삼림(重慶森林)’과 같은 해 ‘동사서독(東邪西毒)’으로 다시 자신의 세 번째, 네 번째 필모그래피를 채우고 난 뒤였다.

영화는 마치 이후 감독의 영화 세계를 원형적으로 보여주듯 홍콩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 그만의 독특한 롱 테이크와 같은 새로운 영화적 스타일,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 물음 등을 통합적으로 선보인다. ‘아비정전’에서 생모를 찾아갔을 때 아비를 뒤따르는 후반부에서의 롱 테이크가 대표적인 예다.

감독은 연이은 후속작을 통해 과감한 음악과 편집 기법을 활용하면서 세기말의 몽환적 분위기를 끌어냈다. 장르 안에 머무는 듯하면서 장르를 벗어나고, 홍콩의 사회와 역사를 은유하는 듯하면서 멜로를 구축하고, 섹슈얼리티에 집중하는 듯하면서 다시 인간의 철학적 문제를 제기해 왔다.

감독 왕가위는 마치 ‘시인’과도 같이, 서정적 이미지와 음악의 선율로 자신의 영화들을 한껏 빛냈다.
 

[임대근 교수의 차이나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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