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에너지 정책 롤 모델로 여겨졌던 대만의 탈원전 정책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됐다. 탈원전 법안 폐기안이 지난 24일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통과하면서다.
25일 대만 중앙선거위원회에 따르면 전날 '탈원전 법안 폐기에 찬성하느냐'를 묻는 국민투표 안건은 찬성 589만5560표를 얻어 59.5% 득표율로 통과됐다. 대만 국민투표는 전체 유권자의 25% 이상이 동의해야 가결된다.
2016년초 집권한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은 지난해 1월 탈원전 관련 법안을 통과시킨 후, 전체 6기의 원전 중 4기의 가동을 정지하고 신규 원전 건설 중단을 지시했다. 하지만 지난해 8월 전력부족으로 대만 전체가 대규모 블랙아웃(정전) 사태를 겪은 후 대만 내에선 전력공급 불안감이 커지며 원전을 다시 가동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탈원전 법안 폐기 항목 이외에도 대만이 2020년 도쿄 하계 올림픽에 ‘차이니스 타이베이(중화 타이베이)’가 아닌 '대만'으로 국호를 바꿔 참가하느냐도 국민투표에 부쳐져 찬성이 476만여명으로, 전체 유권자의 25%에 못 미쳤다.
이 밖에 국민투표에선 △민법상 동성결혼 금지 유지 △매년 1% 이상 화력발전량 감소 △화력발전소 신설 및 확장 중지 △일본 후쿠시마와 주변 지역 농산물 수입 금지 유지 △초·중고교에서 동성 문제 등 성적 다양성 교육 폐지 등의 항목이 통과됐다.·
이번 국민투표는 지방선거와 같은 날 동시에 실시됐다. 탈중국 성향의 차이 총통이 이끄는 민진당 정권 출범 2년 만에 실시된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진당은 친중 성향의 야당 국민당에 참패했다.
25일 홍콩 명보에 따르면 민진당은 전국 6개 직할시와 현·시 등 22개 단체장 중 6개를 확보하는 데 그쳤다. 이는 4년 전 지방선거 때 확보한 13개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반면 야당인 국민당이 확보한 단체장 수는 4년 전 6개에서 15개로 늘었다.
민진당 주석직을 겸임하는 차이 총통은 이날 저녁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선거 결과에 완전히 책임지고 민진당 주석 직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했다. 국정장악력이 약해진 차이 총통은 집권 2년 만에 조기 레임덕에 빠질 것으로 전망된다.
차이잉원 총통 집정 2년 '중간성적표'로 여겨진 지방선거에서 민진당이 참패한 것은 그만큼 차이 총통의 국정운영에 대한 유권자의 불만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예궈하오 홍콩 중문대 사회과학원 객좌교수는 "(민진당 참패가) 경제 문제와 양안 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차이 총통이 연금개혁, 동성혼인 등 정책을 너무 급진적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민중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또 친중 성향의 마잉주(馬英九) 전 총통과 달리 차이 총통이 2016년 초 취임 후 '하나의 중국'을 거부하면서 양안(兩岸·중국 대륙과 대만) 관계도 악화돼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외교적 고립을 초래하고, 경제 상황마저 좀처럼 나아지지 않은 것도 민심이 등 돌린 이유라는 지적이다.
이 밖에 20년간 민진당 '표밭'이었던 남부도시 가오슝(高雄) 시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무명의 정치인 한궈위(韩国瑜) 국민당 후보가 일으킨 열풍, 즉 '한류(韩流)'도 국민당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다.
1957년생인 한 후보는 사실 올 초까지만 해도 무명 정치인이었다. 한때 대만 입법위원(국회의원) 등으로 활동하다가 2012년부터는 타이베이 농산품운수판매공사 총경리를 맡았다. 지난해 사임 후 정치권에 뛰어들어 국민당 내 주석 선거에 참여했다 고배를 마셨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흑색선전이나 비방·인신공격은 하지 않고 가오슝 지역 경제·민생 살리기에만 집중해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평이다. 한류 열풍은 대만 전체로 확산돼 국민당 표심을 끌어올리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