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하나의 역사적 기준점이 되는 판결
매일매일 신문을 만나다 보면, 역사적으로 오래 언급될 기준점이 되는 사건을 접합니다. 신문이란 매일 뉴스를 거의 정해진 그릇 속에 담아 전하는 물건인지라, 저 기점(基點)의 뉴스들도 그 속에 심상한 얼굴로 들어앉아 있을 수 밖에 없죠. 다만, 언론들이 저마다 힘주어 다양한 표현들로 의미를 찾아내는 '소란함' 을 참고하며 저 사건의 심상찮음을 읽을 수는 있을 겁니다.
매일매일 신문을 만나다 보면, 역사적으로 오래 언급될 기준점이 되는 사건을 접합니다. 신문이란 매일 뉴스를 거의 정해진 그릇 속에 담아 전하는 물건인지라, 저 기점(基點)의 뉴스들도 그 속에 심상한 얼굴로 들어앉아 있을 수 밖에 없죠. 다만, 언론들이 저마다 힘주어 다양한 표현들로 의미를 찾아내는 '소란함' 을 참고하며 저 사건의 심상찮음을 읽을 수는 있을 겁니다.
# 113만~146만명 조선인이 끌려간 6년간의 강제징용
제국주의 일본이 식민지인 조선의 사람들을 정식으로 징용하기 시작한 것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입니다. 이 해에 국민총동원법을 만들어 국민징용령을 시행합니다. 1939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6년간 113만~146만명의 조선인이 징용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들은 탄광, 금속광산, 토건공사, 군사시설공사에 동원됐죠.
또다른 강제 징용은 1944년 여자정신대근무령을 발표한 뒤 조선여성을 강제징집한 것입니다. 12세부터 40세까지의 여성을 대상으로 끌고가서 군수공장에서 일하게 하거나 군대 위안부로 보냈습니다. 즉 위안부는 일제 강제징용의 일부인 셈입니다. 강제징용자 중에서 일부는 공사를 끝낸 뒤 군사적 비밀을 발설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집단 학살을 당하기도 합니다.
# 작년에 나온 영화 '군함도'와, 현실로 걸어나온 역사
2017년 영화 '군함도'는 일본의 하시마섬에 끌려간 한국인 징용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입니다. 하시마섬을 군함도(군칸지마)로 처음 부른 것은 1916년 아사히신문이었습니다. 하시마섬과 인근 다카시마섬은 일본 제국주의 근대화의 불쏘시개 역할을 한 해저탄광 지역입니다. 1890년 미쓰비시가 이곳을 인수해 제철시설과 선박의 연료를 채광했죠.
다카시마섬과 하시마섬 탄광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은 4만여명으로 추산합니다. 영화 '군함도'가 일본을 불편하게 한 것은, 군함도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을 했기 때문이었죠. 남의 나라 사람을 끌고가 죽도록 혹사시킨 자취를 '문화유산'으로 올리다니 일말의 양심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 찜찜한 구석을 감추기 위해 일본은 등재대상의 시기를 1910년 이전으로 제한해서 눈가림 신청을 했습니다.
# 징용 피해자의 집요한 소송 결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인 여운택, 신천수, 이춘식, 김규수씨는 2005년 2월에 소송을 냈습니다. 이분들 중 생존해있는 분은 이춘식씨 한분 뿐이죠. 94세의 이춘식씨는 직접 법정에 나와 이 역사적인 대법원 선고를 지켜보았습니다. 이들 4명은 1941년과 1944년 사이 일본제철의 오사카 공장 등으로 끌려갔고, 1945년 일본이 패전한 뒤에 귀국했습니다. 여운택,신천수씨는 1997년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미지급 임금과 손해배상금을 달라고 소송을 냈으나 6년 뒤인 2003년에 패소를 했죠. 그 2년뒤에 다시 국내 소송이 시작된 겁니다.
한국법원이 일본기업에게 일제 때의 피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은, 해방 이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 판결의 핵심적 의미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 있었지만 일제 지배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의 확인입니다. 즉 배상시효가 지났고 같은 사건을 기각한 일본의 판결이 국내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던 기존의 판결을 뒤집은 것이죠. 일제에 대한 개인 배상청구권은 한일청구권 협정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 일본이 과거 죄악을 가리려 얼버무린 점을 역이용
왜 그런가. 대법원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청구권 협정은 양국간 재정적 민사적 채권 채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이 협상과정에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피해배상을 부인했기 때문에 이 협정에 위자료 청구권이 포함됐다고 보기 어렵다." 대법원의 논리는 일본의 역사적 사실의 발뺌을 역으로 받아쳐서 뒷발목을 잡은 것입니다.
# 각 신문의 헤드라인 속에 들어있는 '이 뉴스의 가치'
신문들은 이 뉴스를 다양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적인 판결을 어떻게 부각시킬 것인가 고민한 흔적이 보입니다.
재판거래로 지체된 정의...징용피해자, 하늘서 웃을까 - 한겨레
한겨레는 이전 정권의 재판거래가 이 판결을 지체시켰다는 점을 부각합니다. (박근혜정부와 양승태 전대법원장을 겨냥한 거죠) 그 지체 때문에 징용피해 소송을 낸 분이 이 판결을 접하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소송자 중 김규수씨는 2017년 6월에 타계했습니다.
13년만에 열렸다, 일제 강제징용 배상 길 - 경향신문
경향신문에 소송에 승소하는데 13년이 걸렸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판결이 향후 강제징용자들의 배상의 길을 텄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광복 73년만에..."日기업, 징용피해 배상하라" - 조선일보
조선일보는 한국법원이 일본기업에게 일제 피해를 배상하라고 처음으로 요구했다는 점에 감회를 두고 있습니다.
"日기업, 징용피해 배상해야" 대법 확정...한일관계 격랑 - 매일경제
대법 "강제징용 배상하라" 한일관계 태풍 - 중앙일보
매일경제와 중앙일보는, 대법원이 모처럼 용기있고 의미있는 판결을 내렸다는 점에 역점을 두기보다는, 향후 한일관계가 나빠질 것이라는 걱정을 머리에 올렸습니다. 현실적으로 이 문제도 무시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조간보도들이 나온지 6시간 뒤에 발행한 석간 문화일보에서는 강경화 외교장관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이 통화를 했다는 기사가 1면에 실려 있습니다.
# 일본은 지금 반격의 칼을 갈고 있다
고노는 "한일간 법적 기반이 근본적으로 손상됐다는 점을 일본이 무겁게 보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NHK에 따르면 일본정부는 한국이 마련할 대책을 보아가면서 일본기업에 불이익이 생기지 않도록 외교협상부터 해나갈 계획이며,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제3국을 포함한 중재위원회 개최와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도 검토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로 보자면, 그간의 숙원을 해결한 셈이지만, 일본은 자신들의 침략지배의 자취를 키우는 판결을 시인하지 않으려고 스스로의 외교적 역량과 국제적 위력을 발휘하려고 애쓸 것이 거의 분명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한국의 지혜로운 대책과 외교적으로 설득력 있는 논리 확보가 긴급해보이기도 합니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