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하다."
미국 달러 얘기다. 달러는 최근 신흥시장 통화에 강세를 보이면서도 유로화와 일본 엔화 등 선진국 통화엔 약세를 띠며 투자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반면 달러는 미국보다 경제 성장세가 더딘 유로존(유로화 사용국)과 일본 등 선진국 경쟁 통화엔 약세를 띠며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달러 약세는 다만 유로존과 일본에도 환영할 일이 못 된다. 수출품 가격이 상대적으로 올라 경쟁력이 떨어지고, 수입품 가격이 하락해 안 그래도 약한 인플레이션 압력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0일(현지시간) 투자자들이 이같은 달러의 분열이 초래할 결과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시장에서는 이 추세가 얼마나 계속될지, 오히려 더 강해지는 건 아닌지를 두고 논란이 한창이라고 한다.
미국의 경제 패권 아래 세계 기축통화가 된 달러는 글로벌 금융시장의 중심축 역할을 해왔다. 문제는 최근 달러값을 좌우할 변수가 부쩍 늘었다는 점이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주도하는 무역전쟁 및 재정부양,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금리인상 행보가 대표적이다.
일단의 전문가들은 올해 두드러진 달러 강세가 지난해 시작된 광범위한 달러 약세 추세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무역갈등과 미국의 감세효과가 누그러지고, 연준의 통화긴축 행보가 둔화하면 달러 약세에 힘이 더 실릴 것이라는 전망이다.
유로와 엔화 등 6개 주요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반영하는 달러인덱스는 지난달 고점에서 이미 1.9% 떨어졌다. 잭 매킨타이어 브랜디와인글로벌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우리는 올해 달러 강세를 (일시적인) 역추세로 본다"며 "진짜 추세는 약달러"라고 말했다.
키트 주크스 소시에테제네랄 투자전략가는 달러가 유로존과 일본 등 주요 무역상대국 통화에 대해 여전히 10%가량 고평가돼 있다고 지적했다. 유로와 엔화에 대한 달러의 약세가 한동안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달러가 약세 추세에서도 그나마 유로와 엔화에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미국에서 최근 탄탄한 경제지표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미국 노동부가 지난주 발표한 8월 고용지표는 강력한 임금상승세와 역대 최저치에 가까운 실업률(3.9%)을 다시 확인해줬다. 그 사이 미국에 한참 뒤쳐졌던 일본과 유럽의 경제여건도 나아졌다. 일본은 1분기 -0.9%였던 성장률(전분기 대비, 연율환산)을 2분기에 3%로 끌어올렸고, 유럽연합(EU)는 지난 7월 미국과 협상을 통해 무역전쟁을 둘러싼 불확실성을 일부 해소했다. 일본은행(BOJ)과 유럽중앙은행(ECB)은 여전히 통화부양에 힘쓰고 있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광범위한 달러 약세 추세와 신흥시장은 별개라는 입장이다. 연준이 금리인상 행보가 막바지에 달했다는 신호를 보내지 않는 한 신흥시장에 대한 투매가 수그러들기 어렵다는 것이다. 연준의 금리인상은 그 자체로 신흥시장의 달러빚 상환 부담을 가중시키고 신흥시장의 고금리 매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아드난 아칸트 BNP파리바 자산운용 통화 책임자는 "미국 경제는 경기침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연준이 단지 신흥시장 때문에 통화긴축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CME그룹에 따르면 연준의 금리정책에 민감한 연방기금금리(미국 기준금리) 선물시장에서는 이날 연준이 연내에 기준금리를 두 차례 이상 더 올릴 가능성을 79%로 봤다. 한 달 전보다 19%포인트 높아졌다.
시장에서 '진짜 추세'라고 보는 달러 약세는 미국 다국적 기업들이 해외서 들여오는 수익을 늘려 실적에 호재가 된다. 최근 역대 최장기 랠리 기록을 새로 쓴 미국 증시의 선전을 더 기대해볼 만하다는 얘기다. 원유나 구리 등 달러로 매기는 국제 원자재 가격도 달러 약세로 강세 압력을 받게 된다.
벤 랜돌 뱅크오브아메리카(BofA) 메릴린치 애널리스트는 무역갈등이 고조되면 달러값이 더 오를 가능성도 남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1유로당 1.16달러 수준인 달러/유로 환율이 3분기 중에 1.12달러까지 하락(달러 강세)하고, 내년에는 1.20달러까지 상승(달러 약세)할 것으로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