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뜻을 가진 2개의 고사성어 귤화위지(橘化爲枳), 남귤북지(南橘北枳)의 유래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2500년 전쯤에는 남쪽의 귤이 북으로 가면 탱자가 됐겠지만, 요즘에는 독일의 명차 BMW가 유라시아 대륙을 건너 대한민국에 오면 ‘불자동차’가 된다. 어디 BMW뿐이랴. 독일이 자랑하는 방송음향장비 전문업체 젠하이저 역시 다르지 않았다. BMW와 젠하이저는 디자인이나 각종 경품 행사에서 서로 긴밀히 협력하는 글로벌 독일기업이다.
젠하이저는 1945년 전기 공학자 출신의 프리츠 젠하이저(Fritz Sennheiser) 박사가 만든 독일 굴지의 오디오기기 회사다. 이 회사의 고가 헤드폰·이어폰은 헤드폰계의 BMW·벤츠로 불리고, ‘하이엔드급’은 마이바흐 같은 최고급 명차에 비견될 정도다. 헤드폰 하나에 100만~200만원대 제품이 즐비하고 비싼 건 수천만원을 훌쩍 넘는다.
출퇴근 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뉴스콘텐츠를 검색하는 필자는 1년 전 큰 맘 먹고 10만원대 젠하이저 이어폰을 장만했다. 아주 미세한 음향의 차이를 느끼는 ‘황금귀’는 아니지만 중저음의 묵직함을 즐기는 기쁨이 쏠쏠했다. 그런데 몇 달 지나지 않아 제품에 문제가 생겼다. 휴대폰 연결잭 바로 아래 선 피복이 벗겨졌다. 휴대폰을 살 때 거저 주는 이어폰에서 자주 발생하는, 이어폰 사용자 누구나 경험했을 짜증나는 일이다. 그런데 이 경험이 그저 ‘짜증’에 그치지 않고 귤과 탱자, BMW 사태까지 이어진 이유는 바로 젠하이저코리아의 AS 때문이다.
독일의 귤이 한국에 들어와 탱자가 되는 이유는 옛 중국의 고사처럼 '강 건너 땅' 때문이 아니다. 원칙과 사람과 제도, 이 세 가지의 차이다.
젠하이저코리아에는 제품 AS의 규정은 없고 지키지 않는 원칙만 있다. ‘소비자의 부주의’에 대한 세세한 규정 없이 ‘50% 가격 재구매’라는 원칙을 세웠고 그마저도 안 지킨다. ‘1곳 정도’는 ‘재량’에 따라 무상 수리해 ‘준다’. “원칙은 그렇지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인 한국식이다. 독일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철두철미하고, 꼼꼼한 독일기업이 유럽과 미국에서는 절대 이렇게 못한다고 한다. 세세한 규정, 제대로 된 원칙이 있고, 그 규정과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귤이 탱자가 안 되게 하기 위한 또 다른 중요 변수는 제도다. 젠하이저코리아 측이 "소비자원에 신고하라"고 배짱을 부리는 이유는 한국의 소비자 보호제도가 미비·부실하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레몬법'이라는 강력한 소비자보호법안이 있다. 미국에서 레몬은 불량제품을 지칭한다. 레몬이 겉보기에는 맛난 과일 같지만 그냥 먹을 수는 없다는 점을 빗댄 것이다. 레몬법에 따르면 소비자가 구입한 지 1년 또는 주행거리가 1만2000마일 미만인 자동차에 결함이 네 번 발생하면 자동차 업체가 전액 환불 또는 교환해주도록 하고 있다. 우리는 자동차는커녕 어떤 제품에도 이런 하자에 대한 처리와 보상규정이 허술하다. 선진국에서 일반화된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집단소송제 역시 한국에 없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제조업체가 제품의 하자를 알고도 판매했을 때 단순 피해에 대한 민사상 손해배상을 넘어 천문학적 규모의 형벌적인 금액을 더하는 제도다. 집단소송제는 피해자 일부가 법원에서 승리하면 자동적으로 같은 피해를 입은 소비자에게 제조사가 배상해주는 방식이다.
한국에 일부 비슷한 제도는 있지만 실제로는 무용지물이다. 피해자 수가 많더라도 피해 금액이 미미할 경우 복잡한 절차와 많은 시간, 비용 때문에 피해구제를 포기한다.
우리가 소비자보호의 원칙·사람·제도 3박자를 제대로 갖춘다면, 독일의 귤은 한국에 와서 탱자가 아닌 한라봉이 될 수 있다. 몇천만원이 넘는 BMW로는 그나마 법적 대응을 고려할 수 있지만 10만원짜리 이어폰 때문에 소송을 걸 순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