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체제 중국의 주요 국정 어젠다를 설계해 온 것으로 알려진 왕후닝(王滬寧)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갑작스레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적어도 언론에 노출되는 빈도를 보면 그렇다. 관영 신화통신은 '보도전집(報道專集)'이라는 코너를 통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등 중국 권력의 핵심에 자리한 상무위원단 7인의 동정을 상세히 소개한다.
상무위원들이 주요 영역별로 국정을 분담하는 중국식 통치 방식을 감안하면 한 달 넘게 특정 상무위원의 공식 발언이나 행보가 공개되지 않는 것은 이례적이다.
그동안 왕후닝이 맡아 온 체제 선전이나 핵심 어젠다 설정 업무에 문제가 생겼다고 보는 게 합리적 추론일 수 있다.
그가 주도한 강경 보수 정책이 무역전쟁 등의 반작용을 낳아 시진핑 리더십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근 30년 만에 상무위원급 최고위층의 낙마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中 강경 보수화, 반작용 불렀다
5일 신화통신에 따르면 천시(陳希) 당 중앙조직부장은 전날 허베이성 친황다오 인근 휴양지인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중국과학원·중국공정원 소속 전문가 62명과 함께 좌담회를 열었다. 후춘화(胡春華) 국무원 부총리도 동석했다.
이를 매년 여름 휴가철 열리는 '베이다이허 회의'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중국 전·현직 수뇌부가 비밀리에 모여 다양하 의제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다.
전례를 살펴보면 이념·선전 담당 상무위원이 전문가 좌담회를 주재하는 것으로 회의 시작을 은연 중에 알려 왔다. 상무위원인 왕후닝 대신 한 직급 밑의 중앙정치국원인 천시와 후춘화가 전면에 나선 것은 고개를 갸웃할 만한 일이다.
2013년 시 주석이 집권한 뒤 지난해까지 열린 5번의 전문가 좌담회는 모두 류윈산(劉雲山) 전 상무위원이 주재했다. 시진핑 체제에서 일관되게 보수 강경 노선을 주창해 온 왕후닝에 대한 당내 혹은 외부의 반감을 의식한 조치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왕후닝은 시 주석의 책사로 통한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꾀한다는 중국몽(中國夢)이나 미국을 향해서도 할 말은 하겠다는 신형 대국관계·중국 특색 대국외교 등 시 주석이 호기롭게 외쳤던 선전 구호의 입안자이기도 하다.
동남아시아·중앙아시아를 거쳐 중동·아프리카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 및 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 역시 마찬가지다.
이같은 공세적 행보는 미국이 중국에 최대한의 압박을 가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계기가 됐다. 미·중 무역전쟁은 그 결과물이다. 미국 내에 팽배한 '중국 위협론'에 기름을 부은 셈이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왕후닝은 시 주석의 장기 집권을 가능케 하는 작업을 주도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공산당 당장(黨章)과 헌법에 삽입하고, 개헌을 통해 국가주석직 연임 제한을 없애는 등의 전략이 왕후닝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게 중론이다.
이번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무역전쟁에 따른 경제적 위기, 개인숭배 강화에 따른 민심 이반 등의 책임을 물어 왕후닝 퇴출이 결정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왕후닝이 낙마한다면 지난 1989년 톈안먼 시위 때 무력 진압에 반대하다가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전 총서기 이후 29년 만에 상무위원급 이상의 최고위층이 현직에서 물러나는 사례로 기록될 전망이다.
자오쯔양 이후에도 천시퉁(陳禧同) 전 베이징시 서기와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시 서기가 각각 1995년과 2006년 횡령·수뢰 등 혐의로 낙마했지만 정치국원 신분이었다.
시 주석 집권 이후 '부패 호랑이'로 분류돼 철퇴를 맞은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서기와 쉬차이허우(徐才厚) 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쑨정차이(孫政才) 전 충칭시 서기 등도 최종 신분은 정치국원이었다.
유일하게 상무위원을 지낸 저우융캉(周永康)도 수뢰 등 혐의가 입증돼 입건된 2014년에는 이미 자리에서 물러난 전직이었다.
특히 자오쯔양은 부패 스캔들이 아닌 정치적 이유에 의해 실각했다.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주도한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려던 덩샤오핑(鄧小平)에 맞서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다가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부주석 등의 직위를 강제로 빼앗겼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 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자오쯔양을 아꼈지만 보수파 원로들의 눈밖에 난 그를 내칠 수밖에 없었다.
자오쯔양이 민주화 요구에 부응하려다가 축출됐다면 왕후닝은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시점에 보수 강경 노선을 강화하려다 위기를 맞았다.
◆왕후닝 정치적 희생양 되나
상하이 푸단대 교수 출신의 사회주의 이론가인 왕후닝은 1995년 장쩌민(江澤民) 전 총서기에 의해 발탁돼 당 중앙정책연구실 정치팀장을 맡았다.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은 그를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으로 승진시켰다. 2012년 정치국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지난해 19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 때 상무위원단에 진입했다.
왕후닝은 장쩌민·후진타오·시진핑 등 3대에 걸쳐 권력 유지를 위한 이론적 뒷받침을 해 왔다.
20년 넘게 최고 권력자를 지근에서 보좌한 그는 국력의 급격한 신장을 지켜보며 덩샤오핑이 100년 동안 유지하라던 도광양회(韜光養晦·어둠 속에서 조용히 힘을 기른다) 기조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고 확신했을 수 있다.
중국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대국으로 도약하려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이제 선택은 시 주석의 몫이 됐다. 왕후닝을 희생양 삼아 위기 탈출을 꾀할 수 있다. 학자 출신에 세력도 인맥도 변변치 않은 그를 내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다만 왕후닝의 낙마가 자칫 그간의 실정(失政)을 인정하는 모양새로 비칠 수 있는 것은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중국몽 실현과 1인 체제 확립이 시 주석의 정치적 신념이라면 중국 수뇌부의 보수화 경향이 하루아침에 뒤집힐 가능성은 낮다. 무역전쟁이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먼저 발을 빼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다.
현 시점에서 시 주석이 어떤 선택을 할 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시진핑 체제 2기의 첫 해인 올해 중국이 중요한 갈림길에 서게 됐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