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심옥주가 말하는, 여성독립투사 남자현의 249원80전 '위대한 유언'

2018-08-05 11:49
  • 글자크기 설정

표창원의 4일 '엔딩크레딧' 독립운동 영화제에서 심옥주 소장이 소개한 남자현의 일화 3가지



4일밤 '표창원의 엔딩크레딧(독립운동영화제)'에는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이 게스트로 등장했다. 이날 상영한 영화는 여성무장투쟁가를 다룬 '암살(최동훈 감독)'이었기에 그녀의 출연은 관심을 모았다. 영화 '암살'의 여성저격수 안옥윤(전지현 열연)은 가상인물이지만, 독립투사 남자현을 일정 부분 모델로 했다는 소문이 있었던지라, 남자현에 대한 언급들이 여러 차례 등장했다.
 

[표창원의 '엔딩크레딧'에 출연해 남자현에 대해 얘기하는 심옥주 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


심소장은 이 영화에서 안옥윤의 모델이 남자현 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여러 여성독립운동가의 면모를 차용한 영화적인 '윤색'이라고 말했다. 활동 시기나 주인공의 연령 등을 감안하면 남자현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고, 투쟁 활약상으로 보자면 임산부 무장투쟁가 안경신 같은 분도 떠올린다고 말했다. 또 영화에서 보여준 장면 중에 인상적인 것은 당시의 총기나 폭탄 제조 기술인데, 서구나 일본에서 이런 것을 배워온 공학도 독립투쟁가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남자현과 관련해 심소장이 소개한 부분은 '단지(斷指,손가락을 자름)'와 하얼빈 묘소 실종, 그리고 위대한 유언에 대한 것이었다. 이 대목과 관련해서는 기자가 쓴 '남자현평전-나는 조선의 총구다'에 소개되어 있는 부분을 발췌 인용한다. (심옥주 소장은, 기자가 2008년 월간중앙 남자현 기획에 처음 쓴 '여자안중근'이란 표현을 빌려 설명하기도 했다.)
 

[표창원의 독립운동 영화제 '엔딩크레딧'.]



# 단지(손가락을 자르다, 이 부분은 스토리시(詩)로 된 부분을 인용한다)

서라벌에서 큰 호랑이가 나타난 임술년(1922년)
환인현에서 독립군들이 서로 죽이며 피를 뿌렸지
나는 감연히 조선인들 앞에 나아가 식칼을 들었네
어미 가르침(母指,엄지)으로 모자라면 다시 검지로 말하리라
좌중이 놀라 말렸지만 나는 단죄하듯 서슴없이 내리쳤네
흐르는 피손가락 감싸며 오열하는 무리에게 소리쳤네
"내 손가락을 아낄 것인가, 그대들의 내일을 아낄 것인가"(......)
사람들은 울며 손가락을 묻어 목비(木碑) 세우며
만주벌의 단지여호(斷指女虎, 손가락 자른 여자호랑이)라 하였네(...)
10년만이구나 손가락아 오늘은 무명을 자르마
이름없는 나라의 이름없는 여인이 이름없는 손가락을 잘라
겨레붙이의 뜻에 진실로 이름붙이고자 하나니
무명(無名)아 너는 오늘 나의 총구이며 전사이다(.....)
한 줄기 향기로 온 천지 강고한 뜻을 열자에 써서 담는다
조선여인한대한독립원(朝鮮女人恨 大韓獨立願)!
(152-154쪽)
 

[손자 김시련선생에게서 입수한 '남자현의 유일한 사진']




# 남자현의 묘지

남자현의 묘소는 어떻게 되었을까. 1933년 10월12일 오후 4시 하얼빈 외국인 공동묘지에 자리잡은 남자현 묘 앞에 비석이 세워졌다. 1988년 여름 손자 김시련은 아버지 김성삼이 독립운동 동지들과 함께 남자현의 묘지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한 장을 들고 그곳을 찾아갔다. 묘지는 평지로 바뀌어져 있었다. 김시련은 "할머니의 묘지는 찾을 수 없지만 할머니가 싸우다 세상을 뜬 하얼빈을 보고 가는 것만 해도 만족합니다"라고 말했다. 1958년 하얼빈시 도시건설 대약진 때 시내에 있던 묘지가 모두 20km 떨어진 황산묘지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 사실이 밝혀진 것은 2005년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 강위원 교수는 중국 흑룡강성 일대를 조사했는데, 남자현 여사의 묘소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중국은 동대직가 외국인 묘지를 옮기고 문화공원을 조성하면서 연고가 불분명한 묘지는 모두 없애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황산묘지에는 남자현의 묘소가 없었다. 1967년 국립묘지로 이장 작업을 할 때, 그녀는 가묘(주검없는 무덤)로 묻힐 수 밖에 없었다. (186-187쪽)


* 남자현의 위대한 유언 249원80전

부자(아들 김성삼과 손자 김시련)가 도착했을 때, 남자현은 숨을 거두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것처럼 보였다. 아들과 손자를 보자 두 눈가에서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녀는 "이제는 됐다"라고 조용히 말했다. "나를 조선인이 하는 여관으로 옮겨다오." 남자현은 하얼빈 지단가에 있는 조씨가 운영하는 곳에서 쉬고 싶다고 했다. 고통스런 몸을 이끌고 장소를 옮긴 그날 저녁, 여관에는 독립운동 동료들이 북적였다. 사람들이 떠나가자 그녀는 아들과 손자를 가만히 불렀다. 감춰둔 행낭을 꺼내오라 하고 거기서 249원80전을 꺼냈다."이 돈 중에서 200원은 조선이 독립되는 날 정부에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라. 그리고 손자 김시련을 대학까지 공부시켜서 내 뜻을 알게 하라. 남은 돈 49원80전의 절반은 손자 공부시키는데 쓰고 나머지는 친정에 있는 손자(남재각)를 찾아 교육시켜라."(......)

그녀의 유언은 실천되었다. 손자인 김시련은 몽고 부여현의 중국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하얼빈 농대를 졸업, 해방 뒤에도 교직에 오래 몸담는다. 아들 김성삼은 1935년 경북 영양군 수비면 계동의 남자현 친정에서 종손 남재각을 찾아 만주로 데려와 사범학교에 보낸다. 그는 해방 이후 초등학교 교감을 지냈다. 또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월1일 삼일절 기념식장에서는 특별한 행사 하나가 있었다. 이승만, 김구 등 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남자현이 유언하고 남긴 독립축하금을 임시정부 요인 조영원이 전달한 것이다. (165-167쪽)


                    이상국 아주닷컴 대표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