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의 별'로 불리는 조남기 중국 인민해방군 상장(우리나라 대장)이 지난 17일 밤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
한국전쟁 당시 펑더화이(彭德懷) 중국군 사령관의 한국어 통역을 맡았던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뼛속까지 중국인으로 살았다. 그는 오늘날 중국에서 전체 소수민족을 통틀어 중국 정계와 군부 최고위직인 대장까지 오른 인물로 '조선족의 우상'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중국에서 조선족의 위상이 예전만 못한 가운데 그의 인생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27년 4월 20일 충청북도 청원군 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2세 때인 1939년 조부를 따라 고향땅을 떠나 중국 지린성 융지(永吉)현 조선족 마을에 정착했다. 그의 조부는 다름아닌 1919년 충북 청원군에서 3·1운동을 조직한 독립운동가 조동식이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에도 그의 가족은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남았다.
조 장군은 그해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이후엔 줄곧 공산당 혁명의 길을 걸었다. 특히 1950년 6·25 전쟁 참전은 농민의 아들 출신인 그의 인생을 180도 바꾸는 계기가 됐다.
그는 6·25 전쟁 때 펑더화이 총사령관 지휘 아래 북한을 지원한 중국 인민지원군 중의 일원이었다. 당시 사령부 작전처 참모로 펑더화이의 한국어 통역을 맡았던 그를 박헌영 북한 부수상도 탐냈다. 박헌영은 펑더화이를 통해 그를 북한의 관료로 데려가고 싶다는 의사를 수 차례 전달했으나, 이미 뼛속까지 중국인이 되고자 했던 조 장군이 이를 거절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휴전된 이후에도 북한에 남아있던 그는 1958년 인민지원군 병력과 함께 북한서 철수했다.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이 직접 마중 나와 중국군의 귀국을 환영했다. 조 장군은 그때 처음으로 마오 주석과 마주했다. 사실 그는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마오안잉은 6·25전쟁 때 펑더화이의 러시아 통역을 담당하면서 조 장군과 한방을 썼다. 1950년 11월 25일 미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마오안잉이 전사했을 때 조 장군은 눈물을 흘리며 침통함을 금치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6·25 참전 이후 조남기 장군은 승진가도를 달렸다. 옌볜조선족 자치주에서 근무하다가 60년대 지린성 옌볜군구 정치위원(사단장급)으로 승진한 그는 문화대혁명 당시 홍역을 치르기도 했지만 이후 옌볜조선족자치주 당서기와 지린성 성장, 당서기까지 지냈다. 1988년 중국에 20여년 만에 군대계급제가 회복된 이후 처음으로 상장 계급장을 단 17명 중 유일한 소수민족 출신이었다.
그는 청렴과 근검절약이 몸에 밴 관료였다. 친지를 비롯해 곳곳에서 보내온 선물은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98년 정협 부주석직에 오른 이후인 2000년 4월 우리나라 정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그는 열흘간 체류하며 고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정·재계 인사들과 만났다. 당시 그가 62년 만에 고향 땅 충북 청원군을 찾았을 때 고향 사람들의 환대도 받았다. 깊이 감명받은 그는 중국에서 직접 공수해 온 명주 마오타이(茅台) 술을 고향 사람들에게 권하며 한·중 양국 간 우호가 오래도록 이어지길 기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