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 도발로 야기된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겠다고 나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12일 처음으로 마주 앉았다. 이날 '중립국가' 싱가포르의 휴양지 센토사섬의 카펠라호텔에서 5시간 동안 진행된 '세기의 담판' 후 두 정상은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 목표를 담은 포괄적인 합의문에 서명했다.
양측은 합의문에 "평화와 번영을 위한 양국 국민의 열망에 따라 새로운 미국-북한 관계를 수립할 것을 약속한다"고 명기했다. 또 "한반도에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평화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러나 핵심 이슈이던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 ''완전한 비핵화를 통한 핵 없는 한반도 실현'이라는 공동목표를 적시한 4·27 남북 정상회담의 '판문점 선언'을 뛰어넘지 못했다. 합의문에는 북한이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하고 "비핵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고 했으나 미국 측이 그동안 줄기차게 요구하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출국하기 전 기자회견에서 "적절한 시기에 평양을 방문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완전한 비핵화'와 관련해 김정은 위원장이 "북한 미사일 엔진 실험장 폐쇄를 약속했다"며 "많은 사람을 투입해 북한의 비핵화를 검증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중단하고 "조만간 실제로 종전선언이 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또 "주한미군은 감축하지 않을 것"이라며 "주한미군은 지금 논의에서 빠져 있으며 미래 협상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에는 실패했지만 북·미 양국 정상이 1948년 분단 이후 70년 만에 처음으로 한 테이블에 마주 앉은 것 자체로 불신과 대립을 이어온 양국관계에도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와 38분간의 일대일 단독회담을 마치고 확대회담에 들어가면서, 이번 정상회담을 "평화의 위대한 서곡(a great prelude to peace)"이라고 표현했다고 CNN은 보도했다. 트럼프도 이에 동의하면서 양국 간의 전반적인 관계가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올 11월 미국의 중간선거까지는 북한과의 협상 분위기를 끌고 갈 것으로 보인다. .
이런 가운데 김 위원장으로서는 CVID의 명문화를 요구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확실한 체제 안전보장 조치를 끌어낼 수 있는 전략을 만들어내는 데 고심할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활짝 웃으면서 "여기까지 오는 길이 그리 쉬운 길이 아니었다"며 "우리한테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또 그릇된 편견과 관행 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고 말했다. 아버지인 김정일 시대의 대미 외교 방식에서 벗어나겠다는 선언일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CNN방송은 이번 정상회담을 "전직 부동산 거물이자 리얼리티쇼 스타 출신과 한때 미치광이로 비쳤지만 능수능란한 외교적 수완가로 부상한 무자비한 독재자의 대결"로 묘사하며 "전무후무한 정치인 스타일의 두 사람이 함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운명 속으로 내던져졌다"고 보도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회담 전날 밤 숙소인 세인트리지스호텔에서 나와 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과 함께 카지노 등을 갖춘 싱가포르 시내 대표적 관광명소인 마리나베이샌즈호텔 일대를 전격적으로 둘러봤다. 비핵화 시 트럼프 대통령이 약속한 민간 투자를 바탕으로 한 경제 번영의 청사진을 직접 살펴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