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 당국이 직접 나서서 선임계리사 자격 요건을 강화하라고 지시했지만 현장에서는 시큰둥 하는 모습이다.
4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금융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손해보험 혁신·발전 방안'에 따르면 손보사 선임계리사는 손해보험 전문계리사 또는 일반보험 실무에 3년 이상 종사자에 한해 선임하도록 규정했다. 현재의 선임계리사는 일반손해보험 계리사 종사경력이 없어도 담당할 수 있는 등 자격요건이 지나치게 완화됐다는 지적 탓이다.
이는 최근 대부분 손보사 임원이 선임계리사 자리를 기피하면서 상대적으로 경험이 적은 차·부장급이 업무를 맡게 된 것과 무관치 않다. 현재 주요 손보사 가운데 계리파트 임원이 선임계리사를 맡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그 위상이 급락한 이유는 선임계리사가 공로를 인정받기 어렵고 책임만 지는 자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선임계리사는 출시된 상품에서 문제가 발견될 경우 상당한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반면 상품이 잘될 경우에는 공로를 인정받기가 어렵다.
또 영업을 우선시하는 보험사 구조 상 최고경영자(CEO)가 상품 개발 업무를 진두지휘하는 경우도 많은데 임원들이 선임계리사 역할을 맡아 이에 반대하는 모양새를 취하기 껄끄럽다는 후문도 나온다. 때문에 '계리업무 10년 이상의 경력'이라는 자격 요건을 이용해서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넘기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선임계리사 기피 현상이 지속되자 감독당국은 '자격 요건 강화'라는 강경책을 내놓았다. 리스크가 다양해지는 현 시점에서 오히려 보험 상품에 대한 검증을 강화하기 위해 경험 많은 임원이 선임계리사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최근 사례를 보면 2000년대 초기 대형 생보사들은 수입보험료 확대를 위해 7% 이상의 확정금리형 상품을 판매했으나 곧이어 불어닥친 저금리 기조에 역마진을 우려해야 할 상황이다. 보장 항목이 다양한 실손보험 상품 역시 판매 당시에는 좋았지만 지금은 경영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조치에도 불구하고 일선 손보사에서는 임원들이 선임계리사 역할을 맡지 않을 것 같다는 반응이다. '손해보험 전문계리사 또는 일반보험 실무 3년 이상 종사자' 자격 요건이 임원이 아니라 차·부장급도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손보사에서는 대부분 계리파트 임원이 최고위험관리책임자(CRO) 역할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선임계리사 업무까지 담당하기는 어렵다는 항변도 나온다.
손보사 관계자는 "임원 한 명이 선임계리사 업무만 담당하기는 너무 일이 없고, 반대로 CEO를 맡으면서 선임계리사까지 하기는 너무 바쁘다"며 "대부분 손보사들이 비용 축소를 위해 임원 자리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있음을 감안하면 선임계리사 역할을 맡기기 위해 임원 자리를 늘리는 것은 현실과 맞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