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칼럼] 계란 투척

2018-05-3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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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 시청자미디어재단 서울센터장·경제학박사.



며칠 전 여의도에서의 일이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각, 더불어민주당사 앞은 이미 시위대와 경찰이 뒤엉켜 걸어 가기가 어려웠다. 그때 연달아 퍽, 퍽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위대가 건물에 던진 것은 날계란, 말로만 듣던 계란 투척 광경을 생생히 봤다. 민주당사의 ‘나라다운 나라, 든든한 지방정부'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과 건물 외벽은 터진 계란으로 얼룩졌다. 지척에 있는 자유한국당 당사도 계란의 피습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5월 28일 오후 여의도 국회와 정당 당사 앞은 민주노총이 결행한 ‘최저임금 개악저지 민주노총 수도권 총파업대회'로 아수라장 같았다. 처절한 생존권 싸움을 벌인 현장에 그까짓 계란 던진 게 뭔 대수라고 관심을 갖느냐는 이도 있겠지만 계란 투척은 내 뇌리에 강렬하게 남았다. 하필 왜 계란일까? 사람들은 왜 계란을 던지는 것일까 궁금해진 것이다.

계란은 지난해 살충제 오염 사건으로 시끄러웠지만 한국인의 식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사랑 받는 음식이다. 흰자위(55∼58%)와 노른자위(31%), 난각(11%)으로 구성된 계란은 완전식품이기도 하다. 고단백에다 단백질의 아미노산 조성이 영양학적으로 가장 이상적이며 인체가 필요로 하는 영양소를 대부분 가진 완전식품이지만, 열량은 낮다. 그래서 균형 잡힌 식사에 필수품이고, 다이어트에 제격이며, 숙취 해소에도 좋다.

이처럼 좋은 음식인 계란을 먹지 않고 던지는 행위에는 심리적 기제가 있을 것이다. 주로 투척 대상자에 대한 항의 혹은 분노를 표출하고 모멸감이나 망신을 주려는 의도가 작용한다. 계란에 맞으면 노른자와 흰자가 범벅이 되어 끈적이고 흘러내리는 등 금방 수습하기가 어렵다. 꽤 고약한 비린내도 난다. 맞은 사람은 엄청나게 불쾌하고 수치심이 들겠지만 이 쩔쩔매는 광경을 보는 공격자로서는 통쾌한 감정을 느낄 법하다.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며 언론의 주목을 받기에도 좋다. 게다가 작고 가벼워서 던지기 쉬운데 그 때문에 어떤 사람을 정조준해 제대로 맞혀도 치명상을 입히지는 않는다. 수많은 계란투척 사례를 접했지만 계란에 맞아 생명이 위험하다거나 절명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문헌을 찾아보면 계란 투척이 발견되는 시기는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죄수들에게 칼을 씌우고 눈을 못 뜰 정도로 계란을 던져 모욕을 주는 형벌이 있었다고 한다. 계란 투척이 정치적인 항의 수단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1930년대 조지 엘리엇이 쓴 '미들마치(Middlemarch)'가 출판된 이후라니 흥미롭다. 주인공 브룩(Brooke)이 정치에 입문하기 위해 선거 유세 중 허튼 공약을 제시하다가 군중으로부터 계란 세례를 받고 유럽으로 도망가는 장면이 꼽힌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정치사에서 투척물은 토마토와 크림파이, 밀가루, 초콜릿 등으로 다양하게 변화했지만 대표주자는 역시 계란이다. 근대 민주주의가 발화한 영국에서 계란 투척을 받은 정치인은 마거릿 대처 총리를 비롯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존엄의 상징인 영국 왕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 대통령들도 계란 세례를 피할 수 없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9년 6월 일본으로 출국하는 길에 김포공항에서 한 시민으로부터 IMF 경제위기를 초래한 주범이라며 붉은 페인트가 주입된 계란을 얼굴에 제대로 맞는 봉변을 당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2001년과 2002년 각각 대우자동차 노조 조합원과 농민들로부터 계란 세례를 받았는데, "정치인은 한 번씩 맞아 줘야 국민들 화가 풀린다”고 말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는 대구 서문시장을 찾은 이회창 후보가 머리에, 이명박 후보는 경기 의정부시 유세에서 가슴과 허리에 계란을 맞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3월 구치소로 가면서 승용차에 날아든 계란을 봐야 했다.

계란 투척 대상은 주로 정치인 같은 권력을 가진 이들이다. 정치가 사회 구성원의 이해관계를 타협과 조정으로 최종 결정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지만, 국민이 원하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한 연유도 있을 것이다. 정치인 계란 투척은 이해집단 간 갈등이 극에 달하는 선거를 앞두고 유세나 토론 현장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지난 5월 지방선거에 출마한 원희룡 제주지사 후보가 제주 제2공항 반대 단식농성을 했던 제주도민에게 계란 세례와 폭행을 당했고, 지난해 11월 박지원 의원이 광주에서 안철수 의원 지지자라는 여성이 던진 계란에 오른쪽 뺨을 맞았던 사건이 좋은 예다.

계란 투척은 힘없는 자가 선택하는 분노 표출 혹은 불복종 행위로 볼 수도 있다. 민주주의가 뿌리 내린 현대에도 정치적 항의 수단으로 애용되고 있으니 계란을 민주주의 역사와 함께한 투척물 1위 지위에 올려야 한다는 의미 부여를 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계란 투척은 엄연한 불법 행위다. 한국 현대사에서 등장했던 초산테러나 납치, 칼이나 인분을 쓰거나 물리적 폭력을 가하는 정치인 테러는 말할 것도 없지만, 계란 투척 행위도 형법의 폭행죄로 단죄된다.

결국 제도를 통한 항의와 투표라는 정치행위로 정치인을 심판할 수밖에 없다. 그게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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