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의 장남인 신정균 감독은 16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어머니가 오늘 오후 병원에 신장투석을 받으러 가셨다가 임종하셨다”고 말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최은희는 지난 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했다. 연극 무대를 누비다가 1947년 '새로운 맹서'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후 '밤의 태양'(1948), '마음의 고향'(1949) 등을 찍으며 스타로 떠올랐다.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1950∼60년대 원조 트로이카로 활약했다.
최은희는 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에 출연하면서 신상옥 감독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고 1954년 결혼한 뒤 부부가 함께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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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으로 대종상의 전신인 문교부 주최 제1회 국산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고인은 배우이자, 우리나라의 세 번째 여성 감독이다. '민며느리'(1965)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 등을 연출했다. 감독 겸 배우로 출연한 '민며느리'로는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67년에는 안양영화예술학교의 교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최은희는 신상옥 감독과 이혼한 후 1978년 1월 홀로 홍콩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납치된다. 이후 신 감독도 그해 7월 납북돼 1983년 북한에서 재회했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 촬영소 총장을 맡고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 '사랑 사랑 내 사랑'(1984년) 등 모두 17편의 영화를 찍었다. 고인은 북한에서 만든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는 한국인 최초 해외영화제 수상이다.
신 감독과 최씨는 김정일의 신뢰를 얻고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 방문 중에 미국 대사관에 진입해 망명했다. 이후 10년 넘는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99년 영구 귀국했다.
고인은 2001년 극단 '신협'의 대표로 취임했다. 2002년 뮤지컬 '크레이즈 포 유'를 기획·제작했다. 2007년에는 자신의 영화 인생을 담은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을 펴냈다.
신 감독이 2006년 4월 11일 사망한 후 고인은 허리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악화됐다. 최근까지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투석을 받아왔다. 유족으로는 신정균(영화감독)·상균(미국거주)·명희·승리씨 등 2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12호실 이전 예정)이다. 발인은 19일 오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