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궂게도, 상해에서 탈출한 뒤 임시정부가 이동한 경로가 바로 쑤저우-항저우-광저우-류저우의 순서였다. 중국인들이 꿈에 그리는 이름난 고장을 차례대로 다 들른 셈인데, 그때마다 수당의 마음은 더 착잡했다. 나라를 잃은 것도 모자라 남의 땅에서 왜적에 쫓겨, 유랑걸식이나 다름없는 처지. 충칭으로 가면, 우리 손으로 광복을 이룰 수 있을까.
1938년 2월 수당 가족이 성엄의 임지인 무령을 떠나 창사에서 임시정부에 합류하고, 임정 식구들과 피난길에 올라 류저우에 도착하기까지, 근 1년이라는 시간이 날아갔다. 대륙의 동쪽 끝 장쑤성에서 출발해 한복판인 후난성(湖南省)으로 들어가서, 남쪽 경계인 광둥성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서북쪽 광시성을 향해 물길을 거슬러 올라왔던 것이다.

[류저우에서 결성된 광복진선 청년공작대.수당의 조카 석동이 17세에 가장 어린 대원이 되었다.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청년공작대원이 된 조카 석동
광복진선 청년공작대가 먼저 결성됐다. 청년공작대는 일본군에 맞서 싸울 임시정부 군사조직의 전위대가 될 터였다. 수당의 조카 석동은 열일곱 살 나이로 공작대원을 자청, 가장 나이 어린 대원이 되었다. 후동이도 소년대에 들었다. 조부 동농에 이어 손자까지 3대가 독립운동에 나섰다. 을사년(1905)부터 따지면 나라를 빼앗긴 지 벌써 30년이 훌쩍 지난 것이다.
어쨌든 전투는 젊은 사람들의 몫. 류저우가 있는 광시성(현재 廣西壯族自治區)에서도 젊은이들이 참전해,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 당시 중국정부는 상이군인을 보살필 엄두도 내지 못했고, 이 일을 하는 민간단체로는 중국의 국부인 쑨원의 미망인 쑹칭링(宋慶齡, 장제스 부인 쑹메이링의 언니)이 운영한 상병지우사(傷兵之友社)뿐이었다.

[중국 류저우 임시정부 거처. 사진=위키피디아 제공]
청년공작대가 활동한 기간은 채 두 달이 못 되었다. 임시정부가 류저우에서 마냥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1939년 4월, 임정은 류저우를 떠나 전시수도 충칭이 있는 쓰촨성(四川省)으로 향했다. 버스 여섯 대에 나누어 탄 임정 식구들 앞을 험한 산악지대가 가로막고 있었다. 류저우까지 거슬러왔던 물길 못지않게 위험하고 힘든 길이었다.
류저우는 평탄한 지형이지만 고도가 꽤 높다. 버스는 곳곳에 솟은 길쭉한 바위산들을 위태롭게 돌면서, 구이저우성(貴州省)을 가로질러, 서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임시정부가 강물 위에 떠 있던 게 불과 반년 전인데, 이번에는 달랑 버스 여섯 대에 몸을 싣고 대륙의 굽은 비탈길을 하염없이 오르내려야 했다.
도로 사정도 나빴지만, 버스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툭하면 고장이 났다. 산중에서 망치 하나 들고 고장을 손보는 기사를 기다리노라면, 복장이 터졌다. 하지만 불평할 수도 없다. 장제스가 임시정부 이동을 위해 특별히 배려해서 내준 차량. 물자가 귀한 전시에, 그것도 휘발유로 달리는 버스를 얻어 탄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구이저우성의 수도 구이양(貴陽)으로 가는 길에는 낯선 소수민족들이 살았다. 류저우에는 회교를 믿는 장족이 살았는데, 이번에는 묘족(苗族)이 나타났다. 중국 명주(名酒) 마오타이주(茅苔酒)의 원산지라는 독산(獨山)을 거치기도 했다. 류저우에서 구이양까지는 자동차로 한 나절 달리면 닿을 6백km 거리. 그런데, 열흘이 걸렸다.

[장제스. 임시정부의 이동을 위해 차량 등을 제공했다. 사진=아주경제DB]
고장이 심해 뒤에 놓고 간 버스들이 하나씩 당도했다. 이제는 떠나나 싶었더니, 임시정부는 구이양에서 또 사흘 발이 묶였다. 남편 성엄이 설명해주기를, 버스가 고장 나는 바람에 일정이 지연돼 여비가 떨어져서, 충칭에서 돈 오기를 기다린단다. 참 딱했다. 백 명이 넘는 일행이 객지에서 여관 신세를 지려면 그만큼 돈이 더 들 게 아닌가.
수당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상금이 있었다. 성엄이 중국 관리로 일한 5년 동안 모은 돈이었다. 남편에게 그 돈을 꺼내 놓자, 슬며시 웃기만 한다. 당신은 어떻게 급할 때마다 통하는 수가 샘솟는 거요? 이런 상황을 두고 <수호지(水滸志)>에서 “급시우(及時雨)”라 했던가. 수당은 지체 않고 석오에게 2백원(성엄의 한 달 월급이 20원이었다)을 내드렸다.
사방이 꽉 막힌 형국에서 생각지도 못한 거금을 받은 석오는 놀라면서도, 마치 부끄러운 곳을 들킨 듯 금세 낯빛이 흐려졌다. 어쨌든, 수당의 비상금 덕에 임정 식구들은 곧 구이양을 떠날 수 있었다. 구이양에서 5백km를 더 달려 쓰촨성 남쪽 끝에 있는 치장(綦江)에 도착한 게 1939년 4월말이었다.
치장에서 북쪽으로 1백 리만 더 가면 충칭이다. 동암과 청사(晴蓑) 조성환(曺成煥) 두 분이 먼저 가서 임정이 들 사무실과 식구들이 살 집을 얻었다. 1년 2개월 동안의 피난길. 1만 리가 넘는 여정을, 임정 식구들은 중국 홍군의 장정에 견줘 “만리장정”이라 부르면서, 서로를 위로하며 견뎌냈다. 일본군도 여기까지는 밀고 들어오지 못하리라. 중국정부가 충칭을 포기한다면, 더 피할 곳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