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②] 1911년 망명… 한인학생 군사교육에 힘쓴 예관 신규식

2018-03-2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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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관 신규식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대한제국의 군인,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법무총장․국무총리대리(외무총장 겸임). 충북 문의군(현재 청주시 흥덕구)에서 중추원 의관(議官)을 역임한 신용우(申龍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900년 육군무관학교에 입학, 1902년 보병 참위(參尉)로 임관했다. 을사늑약 직후 의병을 일으켜 항거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이때 후유증으로 오른쪽 시신경을 다쳐 남을 흘겨보는 듯한 눈매가 되어, 스스로 예관(睨觀, 睨는 흘겨본다는 뜻)이라 불렀다.
1907년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된 뒤 광업회사 발기인이 되고, <공업계>라는 월간지를 창간했다. 중동학교(中東學校) 등 교육계에도 관여했으며,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에 참가했다. 191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쑨원(孫文)이 이끄는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에 가입하고 신해혁명(辛亥革命) 주역들과 친교를 맺었다. 한인학생들의 중국 및 구미 유학 예비학교인 박달학원을 설립하고, 군사교육을 위해 10년간 백여명의 학생들을 중국 각지의 군사학교에 입학시켰다.
수당의 친척오빠 정필화와는 일찍부터 교류가 있었으며, 그의 상해생활 초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22년, 임시정부의 분열상을 개탄해 단식으로 이를 막으려다 순국, 상하이 쉬자후이 만국공묘(萬國公墓)에 묻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1993년 유해가 국내로 송환되었다.
김자동,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
푸른역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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