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규의 알쓸軍잡] ‘서해수호의 날’ 기억해야 할 3가지 사건

2018-03-23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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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3회 서해수호의 날’입니다. 정부는 지난 2016년 제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도발로 희생된 55명의 호국영웅을 기리기 위해 매년 3월 넷째 금요일을 ‘서해수호의 날’로 지정해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날은 2010년 당시 천안함이 피격된 날입니다. 돌이켜 보면 여전히 너무 아픈 기억이지만 결코 잊을 수는 없기에 그날의 사건과 그 이후 벌어진 일들을 재구성해 봤습니다.
 

[영화 <연평해전> 스틸컷. 사진=네이버 영화]


1. 2002년 월드컵 열기 한 번에 잠재운 ‘제2연평해전’

2002년 한일 월드컵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 25분. 서해 북방한계선(NLL) 북한 측 해상에서 북한 꽃게잡이 어선을 경계하던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정과 388정이 우리 측 북방한계선을 넘어 계속 남하했습니다.

우리 해군의 참수리급 고속정 4척은 즉각 퇴거 방송을 하며 차단 기동에 나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참수리 358정과 357정이 등산곶 684정의 진행 방향을 가로막으면서 참수리 357호정의 좌현이 그대로 노출됐습니다.

이 찰나 아무런 징후도 없이 등산곶 684정이 85mm 전차포로 선제 기습포격을 가하면서 교전이 시작됐습니다. 참수리 357정의 조타실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참수리 358정은 즉시 대응 사격을 하려 했으나 참수리 357정에 가려 등산곶 684정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참수리 358정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후에야 대응 사격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등산곶 684정은 참수리 357정만을 집요하게 공격했습니다. 참수리 358호정은 단 한 발도 피격되지도 사상자가 발생하지도 않았습니다.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참수리 357의 모형. 사진=wikimedia]


10시 43분. 교전을 치르던 등산곶 684정에서 화염이 발생하자 등산곶 388정과 함께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약 7분 후 북방한계선을 넘어 북상하면서 교전은 25분 만에 끝이 났습니다. 우리 해군은 승리를 거뒀으나 너무 큰 희생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윤영하 소령과 병기부사관 황도현 중사, 병기부사관 조천형 중사, 내연부사관 서후원 중사 4명이 현장에서 전사했고 총탄 파편 100여 개가 박힌 채 살아남았던 박동혁 수병은 합병증으로 그해 9월 숨을 거뒀습니다.

침몰한 참수리 357정과 마지막을 같이했던 조타장 한상국 상사는 41일 만에 해군 해난구조대(SSU)대원들의 수중작전을 통해 뭍으로 옮겨지면서 총 우리 장병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우발적인 충돌로 분석했으나 그 이후 북한은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에서 우리 해군에 참패를 당하면서 치밀하게 복수를 준비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제1연평해전 당시에도 참전했다 대파됐던 등산곶 684정에 85mm 전차포와 ZPU-4 고사총, M-1939 37mm 2연장 고사포 2문을 탑재하라고 직접 지시, 우리 초계정과의 일전을 준비해 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편 북한군 통신 첩보를 수집하는 제5679 정보부대의 부대장을 지낸 한철용 예비역 소장이 국회 증언과 자신의 저서(진실은 하나) 등을 통해 북한군의 이상 징후를 포착했으나 당시 군 수뇌부가 이를 묵살했다고 주장해 논란이 됐습니다.
 

[인양되는 천암함. 사진=연합뉴스]


2. 47명의 목숨 앗아간 ‘천암한 피격’

2010년 3월 26일 오후 9시 30분. 백령도 남서쪽 약 1km 지점에서 인근 해역을 경계 중이던 포항급 초계함인 PCC-772 천안함이 북한의 연어급(130t)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고 선체가 반파돼 침몰했습니다.

피격 이후 인근 해역에서 작전 중이던 포항급 초계함인 PCC-778 속초함과 백령도 등지의 참수리급 고속정, 해경 함정에 의해 58명이 현장에서 구조됐으나 끝내 40명이 전사했고 6명은 여전히 실종상태입니다.

천안함 실종자 중에는 제2연평해전에 참전해 부상을 입었던 박경수 상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상 후유증에 시달리던 박 중사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함선 근무를 택했고 천안함에 승선한 지 불과 1여 년 만에 산화했습니다. 천안함 역시 제1연평해전에 참전했던 함선이었습니다.

천안함 침몰 5일째 실종자 수색에 참여했던 해군 특수전(UDT/SEAL) 여단의 한주호 준위가 계속된 수색과 높은 수압, 강한 유속 등으로 탈진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후송 뒤 감압 치료를 받았으나 순직하기도 했습니다.
 

[천안함 전사자 46명과 한주호 준위. 사진=해군]


사건 초기 해군은 천안함이 어뢰에 피격된 것으로 판단했으나 이명박 정부는 이를 부정하고 기체 피로설과 기뢰 폭파설에 무게를 실었습니다. 당시 침몰 원인 규명을 위해 한국, 미국, 스웨덴, 영국 등 5개국에서 전문가 24여 명으로 구성된 민군 합동조사단이 구성됐습니다.

4월 15일. 천안함이 인양되면서 1차 현장 조사 결과 내부 폭발 가능성과 피로 파괴는 가능성이 없다고 결론 났습니다. 5월 20일 민군 합동조사단에서 “천안함이 어뢰의 수중폭발로 선체가 절단돼 침몰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민군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 발표 4일 후에야 천안함 피격사건을 북한의 군사적 도발로 인정하고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 교역 중단, 북한 선박의 우리 영해 및 EEZ 항해 불허 등을 골자로 하는 ‘5·24조치’ 발표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천안함 피격사건의 배경엔 2009년 북한의 제2차 핵실험 이후 미국이 마카오에 있는 중국계 은행 BDA에 예치되어 있던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통치자금’ 2400만 달러를 동결시킨 것과 이명박 정부의 대북 강경 일변도 정책이 주요하게 작용했다고 평했습니다.
 

[북한에 기습도발 당한 우리 국군이 급히 포 사격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국방부]


3. 휴전 후 북한의 포격에 민간인이 첫 사망한 ‘연평도 포격’

천안함 피격사건 이후 8개월여 만인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 북한이 인천 옹진군 연평면의 대연평도를 향해 포격을 가했습니다. 사건 발생 일주일 전 호국훈련 계획에 따라 연평도 주둔 해병대는 훈련 사실을 공지했습니다.

북한은 이에 사건 당일 오전 8시 20분 남북장성급 군사회담 북측 단장 명의로 “북측 영해에 대한 포 사격이 이루어질 경우 즉각적인 물리적 조치를 경고한다”는 통지문을 우리 군에 발송했습니다.

국방부는 북한의 훈련중단 요청을 거절했고 해병 6여단과 연평부대는 예정대로 오전 10시 15분부터 오후 2시 24분까지 포격 훈련을 진행했습니다. 훈련 종료 10분 후 북한의 76.2mm 평사포, 122mm 대구경 포, 130mm 대구경 포탄이 군부대와 인근 민가로 날아들었습니다.

당시 하교 중이던 연평 초등학교 학생들이 무방비로 위험에 노출됐습니다. 12분간 계속되던 북한군 포격이 멈추자 연평부대 대응 사격을 시작했고 3시 12분부터 3시 41분까지 우리군과 북한군은 포격전을 벌였습니다.

포성이 그친 후 말년휴가를 가기 위해 부두에서 배를 기다리던 중 북의 포격에 인근 방공호로 몸을 피하려다 포탄 파편에 맞아 서정우 병장이 전사했고 대피호에 있던 중 잠시 밖으로 나왔다가 포탄에 문광욱 일병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연평도 해병대 관사 신축공사를 하던 김치백 씨와 배복철 씨 등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북의 이전 도발과는 달리 민간인 거주지역에 포격을 가했고 휴전 이래 우리 영토를 직접 타격해 처음으로 민간인 사망자를 냈던 탓입니다.

자칫 휴전이 깨질 수도 있었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한참 포격전이 벌어지던 중 우리군은 F-15K와 KF-16, 함정을 급파했고 북한도 MiG-23 3대와 경비정을 출동시켜 공중과 해상에서도 무력충돌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격분한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군에 “강력 대응”을 지시했으나 월터 샤프 한미연합사령관이 이를 만류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미 미국은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부담으로 더는 전선을 확대할 수 없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당시, 군 정보기관이 사전에 포사격 징후를 포착해 청와대와 국방부 장관 등 20여개 기관에 알렸음에도 정부와 군 지휘부가 이를 무시했다는 주장이 또다시 제기되면서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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